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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Feb 17. 2021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완연한 봄이

늦어도 좋으니 끝나기 전까지만 꼭.

때는 2018년 6월이었다.

대부분이 버겁게 하루를 견뎌내는 한낮이었고, 아무리 애써도 무수한 대부분 중 하나가 될 수 없었던 나는 무기력하게 침대 위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머리맡에 놓인 책을 괜히 펼쳐봤다. 당연히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텍스트란 건 제아무리 명문이라 한들,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무용한 먹물 자국에 지나지 않는다. 글자만 그랬을까,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음악도 사진도 심지어는 공기도 결국에는 무의미한 누군가의 흔적일 뿐이었다.


창문을 조금도 열지 않고 자단향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공기가 좁다란 방안을 조금씩 채웠다. 하지만 향 몇 개의 연기로 목숨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저기 빈틈은 많았고, 좁은 틈 사이로 공허하게 빠져나가는 내 숨결도 적지 않았으니. 걱정해야 할 일은 방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아니냐고 따져 묻는 주인아저씨의 전화 하나뿐이다. 멍하니 앉아 향내를 들이마셨다. 코끝이 찡하게 아렸다. 그리고 울리는 진동.


한숨을 내쉬고 요란하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다행히 모르는 번호였다. 그냥 끊어버릴까 하다가, 말을 해본 지도 벌써 며칠이나 지난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았다. 심연의 끝까지 가라앉은 목에서 찢어질 듯 갈라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몇 번이나 내 신상을 캐물었다. 18학번 김 모 씨가 맞느냐고, 지금 어디냐고, 집이 학교에서 가까우냐고…. 나는 심통이 나서 그럼 당신은 누구신데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서 자기 할 말만 하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적잖이 당황해서 모 대학 모 과에 재학 중인 김 모 씨의 지도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기에 나는 다시 정중하게 그러시냐고,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냐고 물었다. 그리고 잠깐 정적이 흘렀다. 아마 어이가 없어서였겠지.


교수님은 오늘이 기말고사 시작일이라고 말했다. 아차 싶었지만, 대부분 과목이 출결로 이미 F를 받아놓은 상태라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나는 예의상 첫 시험이 몇 시에 시작하냐고 물어봤다. 사실 내 시험 과목을 교수님께 묻는 것 자체가 불손한 행동이었는데, 그게 그때의 나에게는 최선이었다. 교수님은 자신의 과목인 '컴퓨팅적 사고와 문제 해결'이 30분 후에 시작한다고 말했다. 늦어도 좋으니 끝나기 전까지만 꼭 오라고. 나는 맥없이 침대에 드러누우며, "어쩌죠? 전 코딩을 할 줄 모르는데."라고 답했다. 그래도 오란다. 다시 한 번, 어찌 됐건 끝나기 전까지만 꼭 오라고.


카메라를 손에 들고 모자만 쓴 채로 뿌연 향 연기 속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내가 살던 원룸은 학교와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학교를 거쳐 간 적은 있지만, 강의동을 찾아 캠퍼스를 가로지른 것은 오랜만, 아니 거의 처음이었다. 곳곳에서 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흘러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화 내용 때문인지, 속이 조금 메슥거렸다. 한동안 바다를 오가다 육지에 발을 디딘 어느 선원의 땅 멀미가 대충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오랜만에 도착한 뭍은 봄기운이 완연한데, 나만 홀로 빙빙 도는 느낌.


강의실에 도착해서는 맨 뒷자리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앉았다. 곧 조교 몇 명이 들어오더니, 당연한 주의 사항을 몇 가지 말하고 시험지를 배부했다. 이번에 받아본 텍스트는 집에서 읽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수사와 조사 몇 개를 제외하면 글자들은 나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대개 처음 보는 단어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좋아하던 문장이 눈으로 들어와 다시 허공으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몰라도 되는 것을 당연히 모르는 것 같아서. 옆 사람에게 빌린 볼펜을 손에 쥐고 시험지에 성심성의껏 헛소리를 적었다.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곧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를 것 같아서 그랬다. 하지만 빈칸 없이 시험지를 빽빽이 다 채웠을 때도 교수님은 들어오지 않았다.


공허하게 고개를 들고 멍을 때렸다. 수업도 첫 수업 한 번 왔는데, 엎드려 자거나 1등으로 나가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하는 죄책감이 들어서였다. 아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도 모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뼈빠지게 돈을 버는 엄마와 아빠에 대한 죄책감. 하지만 그것도 잠깐, 나는 다시 회귀하여 무용한 것들로 무용한 삶에 무용한 의미를 부여했다. 강의실 천장과 벽을 꼼꼼히 훑었고, 갖가지 문양과 그 사이사이 들러붙은 먼지에 대해 생각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쁜 것은 별로 없었다. 되도록 멀리서, 대충 봐야 그나마 볼만한 것들 투성이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강의실에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학생들을 훑어봤다. 거개가 머리를 긁적이며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었다. 따분한 공기가 진회색 강의실을 물들였다. 그리고 갑자기 번쩍. 만약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어두컴컴하고 쓸쓸한 분위기에 숨이 막혀 기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날씨에 맞지 않는 길고 두꺼운 워커에, 물 빠진 검은색 메탈리카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로테스크한 타투가 팔뚝, 아니면 그 위부터 손가락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와 비슷하게 멍하니 앉아 강의실 곳곳을 훑고 있었다.


동질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아서 한동안 그 사람을 바라봤다. 이 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기 위로였는데, 말 그대로 위로의 역할을 톡톡히 했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로 볼펜을 돌리며 다리를 떨던 그녀는 여기저기 시선을 떨구다가 결국에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도 나도 바늘에 찔린 듯 움찔했다. 나는 애써 눈을 피하며 이곳저곳을 바라보다가, 어색한 분위기가 견디기 어려워서 시험지를 제출하고 밖으로 나갔다.


강의동 앞 흡연실에 들어가서 아직 온전하지 못한 정신을 불러들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또 한 번 화들짝 놀랐다. 그 사람이었다. 그녀는 먼저 나가줘서 고맙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고는 다음 학기에도 학교에 다닐 거냐고 물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영 떠날지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다음 학기에는 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도 그럴 것 같다고 말하며, 다시 청춘이 만연한 캠퍼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왜인지 그녀가 깊은 못의 바닥까지 가라앉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묘한 기시감이 정신을 어질하게 만들었다.


헛헛한 마음이 들어서 학교 정문 앞 어느 한적한 카페에 들어갔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주욱 훑어봤지만, 마음에 드는 책은 없었다. 그때는 책뿐 아니라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황량한 경의선 철길을 가만히 바라봤다. 대략 10분 간격으로 철마가 황야를 가로질렀다. 몇 명이 내렸고, 열차 안에 생긴 빈자리를 다른 몇 명이 채웠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시간 감각은 이미 완전히 사라진 후였지만, 불그스름한 미세먼지가 하늘을 가득 뒤덮은 것을 보면 분명 시간이 흐른 것이다. 철마는 아직도 쉬지 않고 무심하게 몸뚱이를 멈췄다가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빈자리가 생겼고, 객실에 생긴 빈자리를 다른 몇 명이 채웠다.


온종일 창문을 닳도록 바라보고 있으니, 또다시 헛헛함이 밀려왔다. 뱃속과 마음이 모두 텅 비어서 생긴 헛헛함이어서 멀미가 일었다. 카메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곧바로 다시 앉았다. 사람이 아무도 타고 내리지 않는 열차를 꼭 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보이지 않는 끝이 정해진 이번에는 시간이 조금 더디게 흘렀다. 아니면 그냥 배차간격이 조금 더 길었던 걸 수도 있다. 어둠이 내려앉는 속도에 비례해서 유리창에 비친 카페의 반영도 조금씩 진해졌다. 그리고 그 반투명 파노라마의 끝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내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 역시 열차에 타고 내리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 하나라는 생각에 조금 쓸쓸했다. 나는 살며시 눈을 감고 나를 지나쳐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색채가 없는 나를 지나쳐간 무수한 원색의 행렬을.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옆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보드게임을 한가득 품에 안은 채로였다. 내가 어리둥절하며 이게 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은 뭐긴 뭐예요 보드게임이지라고 말했다. 하나도 할 줄 모른다는 말에는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말이 자꾸 마음에 밟혔다. 마침 마음이 텅 비었는데, 그녀가 그 공간에 비집고 들어온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서 종을 치고, 카드를 뒤집고, 펭귄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얼음을 부쉈다. 나는 기억의 끝이 미치는 순간부터 내내 메마른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웃고 떠들며 노는 일이 마냥 어려운 줄만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하면 될 뿐이었다. 한바탕 보드게임을 끝낸 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피를 홀짝였다. 사장님이 공들여 볶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던 원두는 역시나 밸런스가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원래는 전혀 괜찮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때는 그냥 괜찮았다. 커피를 마시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난 다음에는 지난주에 찍은 사진들을 보정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이제 집에 들어갈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다행히 아무도 다음에 밥이나 먹자거나, 또 보자거나 하는 따분한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난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참 다행인 일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그녀는 지하철역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번에는 바다에서 뭍을 향해 헤엄치는 사람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지났다.


그저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헤어진 것, 그럭저럭 괜찮은 시작이고 그럭저럭 괜찮은 끝. 시작부터 적당했던 하루의 끝은 이토록 적당해야 마땅하다. 지하차도에 들어섰을 때는 철마가 머리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방금 밖으로 나온 듯, 적당히 미지근한 터널 속을 산뜻하게 걸었다. 언젠가는 그녀와 나에게도 완연한 봄기운이 끼치기를 바라본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미지근한 봄기운이 끼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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