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플레이리스트
라벨의 라 발스(La Valse)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과 어울릴 것 같은 음악”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끄덕인 적 있다. 물론 실제로 어떤 연관성은 없다. ’영국적인 것'과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라 발스는 비엔나 왈츠의 형식을 차용한 곡이다.* 그런데 왠지 밤의 무도회가 끝난 다음 사람 하나 죽어나올 것 같은 그런 섬뜩함이 아름답고 화려한 음들 뒤에 숨어 있다. <밤의 가스파르>, <거울>,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등 라벨의 다른 곡들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있다. 우아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화려함이 유려하게 이어지다가 순간 균형을 잃고 광기가 폭발하는 것 같은, 그러나 광기의 순간에도 또 절묘하게 균형을 잃지 않는 음악이라고 할까.
라벨의 음악에 대한 설명에는 보통 드뷔시가 함께 등장한다. 물론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두 작곡가가 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한 곡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늘, 드뷔시와 라벨은 꽤나 다른 것 같은데 왜 늘 함께 언급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곤 한다. 무엇보다 드뷔시에게는 ‘미친 것 같은 느낌’이 없기에.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드뷔시가 더 음악적으로 진보적이었고 라벨은 상대적으로 더 보수적이었다는 설명이다. 드뷔시는 온온음계라는 자기만의 음계를 새로 만들었고, 기존에 잘 쓰지 않던 9도, 11도 화음 같은 것을 즐겨 사용했으며, 주제 선율을 파악하기 어렵고 조성의 원리나 장르의 규칙에서 이탈한 곡들을 썼는데 비해, 라벨은 고전적인 소나타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던가, 드뷔시보다 더 조성음악의 규칙에 충실했다던가 해서 더 명확하고 구조적인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이 통상적인 설명이다.
그런데 왜 라벨의 곡에는 그토록 불균형적인 느낌이 있을까? 그건 어쩌면 명확한 형식을 차용하되 그것을 비트는 방법이 그 형식에서 아예 떠난 것보다 더 극명한 대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닐까. 파괴적 효과는 우아한 몸짓과 함께 등장할 때 더 강한 인상을 가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표현은 반대로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라벨은 전통적 조성음악에서 이탈했지만 여전히 고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고전음악을 패러디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해체한 작곡가라고.
음의 물리적 진동이 음악적 가상을 역으로 모방하는 움직임 어딘가에 라벨의 음악이 있다. 이 곡이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곡에 바치는 오마주라는 라벨의 말은 또 다른 훼이크가 아닐까. 무도회장에는 테이블이 쓰러지고 샹들리에가 떨어진다. 폭풍의 밤이다. 리듬은 물이 쏟아지듯 급변하고, 극단적으로 낮은 곳에서 굉음이 울리고, 무엇인가가 깨어지듯이 글리산도가 건반을 질주한다. 그러나 이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 아름다운 선율이 솟아른다. 오차없는 화음이 들린다. 춤은 계속된다. 하지만 이쯤되면 왈츠는 곡이 출발한 토대가 아니라 오히려 곡이 모방하는 실체 없는 공백으로 느껴진다. 마치 일본 신본격 추리소설이 골든 에이지 추리소설을 모범으로 삼는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모방의 대상이 되는 원전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었음을 깨닫는 것 같은 순간이라고나 할까.
라벨은 종종 오케스트라곡을 피아노로 편곡했는데, <라 발스> 역시 두 버전이 다 있다(피아노 버전은 포 핸즈와 솔로 버전 두 개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피아노 버전이 더 해체적인 느낌을 준다고 생각한다. 오케스트라 버전에서는 현악기와 관악기가 왈츠의 느낌을 아직 붙잡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또 피아노 버전의 경우 여러 악기들이 담당했던 부분을 피아노가 혼자 커버해야 하기 때문에, 연주자에게 부담이 많이 주어진다. 역시나 광기 한 스푼 추가하지 않고는 연주하기 힘든 느낌이다. 하지만 이 광기는 연주자 자신의 감정 표현이어서는 안 되고 음들의 자기표현이어야 하기에, 즉 철저히 테크닉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기에, 극악의 기술적 난이도를 자랑하는 라벨의 곡들이 왜 피아니스트들에게 큰 도전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스위스 시계공과 같은” 엄밀한 리듬과 깨어지는 것 같은 불균형이 공존하는 연주여야 하니까.
그래서, 이상한 말일 수도 있는데, 너무 ‘영혼이 있는’ 연주는 라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영혼은 없지만 폭발은 있어야 한다. 음악을 많이 들을수록, 어떤 연주자를 제일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각각의 곡들에 어울리는 (혹은 나의 취향에 맞는) 연주가 있는 것 같다. 라벨의 경우는 루이 로르티의 묘하게 공허하고 몽환적인 연주를 좋아한다.
https://youtu.be/f8LhcRNk7CY?si=7yToHAZEAIl_bOuH
https://youtu.be/TMSgWhIENSk?si=Ju6HOwmMaQH3tllX
피아노 솔로 버전으로는 후지타 마오의 반짝반짝 튀어오르는 것 같은 연주도 인상적이다.
https://youtu.be/KqCWvL7cEps?si=JLFDxoZPQyIYHnx0
- 라벨은 곡 제목을 기가 막히게 붙이는 재주가 있다. 뭔가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고 궁금하게 만드는 그런 제목들이 많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밤의 가스파르>
<쿠프랭의 무덤>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고풍스러운 미뉴에트>
등등.
(사실 제목 자체에 벌써 해체적이고 관조적인 느낌이 있다.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 ‘발스’는 프랑스어로 ‘왈츠’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