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번 대충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나의 이 대충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진지한 고찰을 해보기로 하자. 나는 어릴 때 정신없이 말썽을 부리던 언니, 동생과 다르게 "아기보살"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에티튜드로 부모님의 마음에 평안을 주곤 했었는데, 정말 아주 가끔 이상한 짓으로 아주 가끔 잔잔하게 놀라게 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신발끈을 제대로 묶고 다니지 않아 신발끈을 밟고 다녀 끈이 더러워져도 매번 신발끈을 제대로 묶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하기 싫다는 이유로 학습지를 벅벅 대충 찢어서 그대로 식탁 아래에 버렸다가 선생님께 들통났던 것, 3초면 들통날 거짓말을 성의 없이 했던 것이 내 인생의 대충 역사의 첫 페이지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사춘기도 대충 무난하게 넘긴 나는 정말 평균적인 점수를 유지하던 나는 인서울 대신, 집과 그리 멀지 않은 대학교에 합격했다. 문과는 경영이라기에 경영학부를 지원했고,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학사모를 쓰고 멋진 경영인이 된 나를 상상해 보곤 했는데 이게 웬걸. 그 대학은 이름순으로 과를 나눈다는 것이 아닌가. K-김 씨들은 모조리 경영학과, '박'부터는 회계학과, '이'들은 무역학과, 그리고 그 외의 나머지 성씨 친구들은 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된 기적의 학부! 아무리 좋은 대학이 아니라고 한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아니 어떻게 4년의 인생을 성으로 가를 수 있단 말인가. 김 씨로 태어나지 못한 나는 그렇게 싫어하던 숫자의 학문인 회계학과의 학생이 되었다. 등록금은 또 더럽게 비싼데 이렇게 주먹구구로 대충 운영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충"이라는 단어가 대학교로 태어나면 바로 이 대학교였을 것이라고, 욕을 디립다 하다가 2학년이 되었을 때 무역학과로 전과를 했고, 또 욕을 디립다 하면서 대충 4년을 보냈다.
대학교 정문을 지날 때보다 나보다 더한 놈이라고,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묵묵히 졸업을 한 나는 이제는 야무지게 살고 싶었다. "출판디자인"의 꿈을 꾸었던 나는 그 길로 내일 배움 카드를 만들러 갔다가, "여자는 회계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라는 상담사님의 언변에 홀라당 넘어가 회계자격증을 취득하고, 회계일을 시작했다. 왜 아빠는 김 씨가 아니라서, 내가 회계학과에 가야 되냐고 울면서 자퇴하겠다던 사람이 다시 회계일을 시작했다니. 정말 다시 생각해도 나 자신에게 화가 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각해 보니 10대든, 20대든 나의 모습은 늘 같았다. 엄마가 이제 너도 컸으니 네 방 걸레질은 네가 하라며 걸레를 던져주었을 때, 나는 군말 없이 걸레를 받아 방을 닦았다. 대충 닦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엄마가 이제 너네도 빨래를 접거라~하며 빨랫감을 던져주었을 때, 역시 나는 군말 없이 옷을 접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다가 귀찮아지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접어야 하는 옷을 입는 것으로 갈음했던 것이 문제였지만, 나는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았는데 콘센트를 꽂지 않아 1시간 동안 충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또다시 다짐했다.
회계일을 돌고 돌아, 나는 프리랜서라고 해야 하나, 백수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지만 일단 조직 밖에서 돈을 벌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굉장히 소박한 소득이지만, 나는 그래도 지금의 내가 좋다. 꿈이었던 프리랜서길에 한 발짝 다가선 느낌이다.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충 시작을 했던 것 덕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2022년 나의 소득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꾸준히 쓰던 글도 아니고, 신체노동으로 번 돈도 아닌, 그림(인스타툰)으로 번 돈이기 때문이다. 팔다리도 제대로 못 그리지만, 초등학교 일기장에 그렸던 그림 수준보다 나아지지 않은 그림이지만 일단 대충 시작해 보자! 생각했더니, 돈을 벌 수 있게 된 매직. 나는 이것을 대충매직이라 부르고, 앞으로도 이렇게 대충 시작을 해보려고 한다. 시작은 미미하고, 끝도 미미할지 모르지만 일단 뭐라도 하다 보면 뭔가 대충 뭐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대충 사는 내가 브런치는 대충 쓰고 싶지 않았나 보다. 잘 쓰고 싶었고, 더 다듬고 싶어서 글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글을 쓰는 방법을 까먹은 나머지 한 글자도 못 썼을 때,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시 브런치에 글을 꾸준히 쓰련다. 힘을 빼고, 잘할 생각하지 말고, 일단 쓰자. 늘 끈을 대충 묶어서 자주 주저앉아 신발끈을 묶어야 했지만, 학습지를 찢어서 바닥에 버리곤 했지만 그래도 걸었고, 공부를 했기에 회계학과에라도 갔던 것이 아닐까. (하하)
카페에 왔다. 오랜만에 카페인에 거하게 취하고 싶은 나는 매일 먹던 음료 대신, 캐러멜 프라푸치노를 시켰다. 하지만, 나는 카페인에 약하니까 카페인 옵션을 줄여야지. 새해가 되니 이렇게 야무질 수없다. 흡족한 마음으로 캐러멜 프라푸치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 이름이 불린 테이블 위에는 휘핑크림이 야무지게 올라간 프라푸치노가 날 보고 있었다. 아, 휘핑크림을 빼는 옵션을 선택하지 못한 것이다. 아, 신이시여. 왜 저에게 야무짐 한 스푼을 넣어주지 않으셨나요,라고 고개를 숙이며 받아 온 휘핑크림이 올라간 캐러멜프라푸치노... 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갑자기 군침이 돌았다. 사실 휘핑크림은 정말 맛있으니까. 얼른 종이빨대를 뜯어 산처럼 높은 휘핑크림을 콕 찍어 맛봤다. 아, 달다 달아. 대충 주문했지만, 그 덕분에 대충 행복해질 수 있다니. 세상에. 역시, 대충 살아야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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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을 처음으로 바꾸어보았습니다. 이제 온라인 어디서든 <프니>라는 이름으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