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진이서울에서주말을보내는법
지난 일요일에는 아이스링크에 갔다. 신기하게도 나이가 들수록-아직 나이가 들었다고 하기에는 쑥스러운 나이지만-주말 활동량이 늘어나고 있다. 일반적인 인간의 습성과 역행하는 것 같아 어째 머쓱하다. 어쩌면 나의 20대가 과하게 반경이 좁았던 것일 수도 있겠다. 원체 활동적인 스타일은 아니긴 했지만, 갑자기 얻게 된 회사원이라는 역할이 너무나 무거웠던 게 주된 이유였다. 입사 초기의 주말 이틀은 머지않아 돌아올 월요일을 위한 준비시간에 불과했다. 주중에 못 잔 잠을 몰아 자고, 앞으로 5일간 소진할 에너지를 비축하고, 회사에서 겪게 될 시달림에 대처하기 위해 한 주간 오염된 머릿속을 정화하는 작업을 하는 날일 뿐이었다. 이틀간 불필요한 타인과의 소통을 최소화하며 나라는 사람을 휴면 모드로 전환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밀린 잠을 모아 자니 당연히 피로가 풀리긴 했다. 침대 근방 1m로 제한된 행동반경 때문에 근육량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많은 시간이 흘러 마침내 회사라는 공간에 적응하니 그제야 주말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주말에도 일찍 눈을 떠서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걱정보다 주중에 쌓인 피로가 덜 풀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는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주말이 조금이나마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간 누워서 보낸 주말들이 아깝긴 했지만 어쩌랴. 다시 돌아가도 그때 그대로 행동할 것을 알기에 아쉽지는 않았다.
이번 주는 목동 아이스링크에 갔다. 내가 아직 어린이였을 때 아래층 친한 언니와 함께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하는 어린이 스케이트 방학 특강을 들었다. 엄마는 없는 형편에 백화점 스포츠 용품 매장에서 흰색 피겨 스케이트화까지 한 켤레 사주었다. 매일 묵직한 스케이트를 들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서 까마득한 잠실역으로 향했다. 아이스링크의 알싸한 공기가 기분이 좋았다. 처음 신어본 스케이트의 딱딱한 가죽에 복숭아뼈 근처가 홀랑 다 까져버렸지만 그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사각사각 얼음을 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는 얇게 잘린 스펀지를 양말 속에 덧대가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기다려졌던 이유는 비단 스케이트가 재밌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니와 나는 매일같이 수업이 끝나면 롯데월드 아이스링크 근처 롯데리아를 방앗간처럼 들렸다. 용돈으로 받은 오백 원짜리를 모아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된 도시락 세트라는 이름의 메뉴를 시켰다. 처음 먹어보는 해시브라운의 맛이 마음에 들었다. 기름을 잔뜩 먹은 채 튀겨진 해시브라운은 익숙했던 감자튀김과는 다른 롯데월드의 맛이 났다. 케첩을 뿌려 먹으면서 나는 그 방학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해시브라운 덕분에 통통히 살이 오른 나는 모범생처럼 앞으로 나가는 법, 멈추는 법, 가볍게 점프하는 법, 뒤로 달리는 법을 성실히 배웠다. 아이스링크의 서늘한 공기에 익숙해지고 복숭아뼈에 굳은살이 생길 때쯤 방학이 끝났다. 이듬해 발은 훌쩍 자라버렸고 아직 새 가죽 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스케이트는 더 이상 신을 수 없게 되었다. 롯데리아의 도시락 세트도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오랜만에 간 아이스링크라 잔뜩 긴장했다. 스케이트화를 대여하자 추억 속의 예쁜 하얀 가죽 스케이트화 대신 딱딱하고 못생긴 스케이트화 한 켤레가 툭 하고 나타났다. 그때 그 새하얗던 내 스케이트화가 그리웠다. 수 만 명은 신었을 것 같은 낡은 스케이트화를 신고 날 자국이 잔뜩 나있는 빙판에 발을 디디자 나는 금세 90년 대의 그 볼이 통통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조금의 휘청거림도 없이 링크를 스윽스윽 스치며 앞으로 나갔다. 이것이 조기 교육의 중요성인가. 함께 간 운동신경이 뛰어난 일행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나는 괜히 더 기분이 좋아져 사람들을 제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딱딱한 스케이트화 안에서 발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한참 땀을 빼고 무감각해진 발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도시락 세트를 팔지 않는 롯데리아에 대신 고깃집으로 향했다. 고기를 발효해서 맛을 살렸다고 주장하는 비싼 가게였다. 1인분에 2만 원이 훌쩍 넘는 돼지고기라니. 아무리 물가가 올랐다고 해도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힘없는 분노가 생겨날 뻔했지만 비싼 돼지고기로 배를 채우고 나니 가성비 좋지 않은 애매한 만족감이 찾아왔다. 언젠가부터 롯데리아는 가끔 새우버거가 땡길 때를 제외하고는 제 발로 찾는 일이 줄어들었다. 당연하게도 해시 브라운을 양껏 시켜 먹어도 그의 그 행복은 느껴지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행복했던 경험들 때문에 행복의 역치가 높아지는 바람에 새로운 행복을 느끼기가 어려워졌다. 지금 도시락 세트를 다시 먹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의 그 맛이 날까? 어쩌면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에는 오늘 먹은 오버프라이스된 돼지고기로 느꼈던 희미하고 옅은 행복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퉁퉁 부어 무거워진 발과 가브리살로 가득 찬 배를 안고 집으로 향했다. 즐거운 일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