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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은희 Jun 09. 2019

스물다섯, 나 홀로 호주 워킹홀리데이

EP02_ 한국에서나 호주에서나 돈이 웬수다.

sunshine coast


홀로 떠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사실 혼자가 아니었다. 나보다 먼저 남자 친구를 따라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온 고교 동창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첫 도시 브리즈번에 도착했을 때 친구가 잠시 볼일이 있어 한국에 다녀온다며 떠난 사이 일주일간의 공백이 생겼다. 친구가 돌아오면 함께 농장에 가기로 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4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선샤인 코스트 지역의 시골로 내려가야 했는데 친구는 세컨 비자를 위해 나는 돈을 모을 목적이었다. 마침 친구가 믿을만한 농장을 알고 있었고 별 의심 없이 함께 가고 싶었다. 당시에 나는 200만 원 남짓한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 나를 자꾸 불안하게 했다.



친구가 브리즈번에 왔다. 이틀 정도가 지난 후에 우리는 생애 처음 선샤인 코스트로 향했다. 농장에 가지 않았으면 아마 평생 가지 못했을 그곳으로 기차를 타고 향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한 선샤인 코스트는 영화에서 자주 봤던 호주 시골 마을이었다. 조용하고 노을이 예쁜 마을. 나는 친구를 마중 나온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기차역에서 40분 거리인 농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말았다.


농장일을 하는 친구들이 머물고 있다는 백팩커스는 아주 더럽고 오래되어 보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야만 농장일을 주기 때문에 다들 어쩔 수 없이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호주는 한국과 다르게 월급이 아닌 주급을 받는다. 때문에 방값도 주세로 내게 되어있다. 한 주에 160불. 도미토리에 시설이 낙후되어 있는 숙소 치고는 매우 비쌌다. 또 방에 선풍기가 없어 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야 했다. 나처럼 잠귀가 밝고 예민한 사람은 살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마음이 무겁고 무서워졌다. 다시 시티로 돌아가기엔 당장의 돈도 없었고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2층 침대가 5개 들어가 있는 Happy room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방의 이름은 party room이었기 때문에 늦게까지 노래를 틀고 노는 분위기였다. 백팩커스 침대는 낡아서 매트리스엔 보풀이 일었고 잘 때마다 배드 버그가 다리를 물어 진물이 나게 긁어야 했다. 화장실이 각 방마다 있는 게 아니어서 농장 일이 끝나면 땀과 흙 범벅인 채로 차례를 기다려 씻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건 함께 머무르는 친구들이 정말 좋았던 까닭이다. 한국어를 몇 단어 안다면서 적응을 못하는 나에게 말을 걸어주던 일본 친구들, 검푸른 새벽에 good morning 이라며 아침을 깨우는 아일랜드 친구들. 그리운 이유는 어디에나 하나씩 있다.


다들 세컨 비자를 위해 농장일을 해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하고 밤 10시가 되면 모두 다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사실 나는 이틀간 일을 하고 잘리고 말았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Hourly ( 시급제 농장)이었고 시급도 당시 환율로 24불이면 돈을 아주 많이 벌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농장 일이라고는 태어나서 처음이라 서툴렀던 것 같다. (그리고 벌레를 아주 아주 싫어했는데 호주 벌레는 내 주먹만 했다.) 우리의 일자리를 관리해주시던 오너는 미안하지만 다른 일을 구해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첫 직장을 잃고 말았다.


이틀간 벌었던 돈 300불. 한국돈으로 약 25만 원 정도였다. 다리가 저리고 쑤시고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팔을 새카맣게 탔다. 농장 한가득 풀냄새를 맡는 게 좋았지만 한편으로 농부를 업으로 삼으신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다음 농장은 딸기 모종을 심는 곳이라고 했고 다음 일을 하기 위해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아침이 오고 우리는 또 한 번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농장이 백팩커스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어서 운전을 못하면 농장까지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가 가야 하는 농장 차의 인원은 가득 찼다고 했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준비했지만 결국 농장에 갈 수 없었다. 누군가가 빠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기에 호주에 초기 정착 비용이 많지 않았던 나는 더 머무를 수가 없었다. 노트북을 켜고 근처에 있는 농장으로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호주에서는 한인 농장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이 아주 많았지만 연락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한 한인 농장과 연락이 닿았고 다음날에 바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일주일간의 선샤인 코스트에서 농장 생활이 막을 내렸다. 함께 지내던 착하고 좋은 친구들이 그리워질 테지만 지금은 이 농장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일주일간 정이 많이 들어버린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카불처에 있는 농장으로 다시 한번 향하게 되었다.


빨리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국에서도 퇴사 후에 재취업을 위해 간단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격증 공부를 하며 돈을 모았었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를 포기할 수 없어 가진 돈을 모두 들고 이곳으로 떠나왔기 때문이었다. 돈이 떨어진다고 해도 한국에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죽기 살기로 다음 농장에 도착했지만 이 곳 또한 환경이 좋지 않았다. 호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가정집이었는데 한국인이 13명이 살고 있었다. 대가족도 13명은 안될 거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노는 그 틈에서 잠을 자려니 숨이 턱 막혀왔다. 정말 울고 싶었지만 울 수도 없었다. 모두 내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다음날 짐을 모조리 싸서 아침에 기차를 타고 브리즈번 시티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2주 동안 일어난 일이라기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다시 두 번째 브리즈번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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