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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Mar 02. 2021

동네 산책


 유치원부터 20살이 될 때까지 쭉 살았던 동네로 다시 이사 왔다. 돌고 돌아, 여기저기 기억이 묻지 않은 곳이 없는 이곳으로.     


 분명 견딜 수 없는 피곤함에 12시가 되기 전 눈을 감았는데 잠에서 깬 건 고작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피곤은 가시지 않았으나 잠은 오지 않고, 기운이 쭉 빠져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 아니, 할 수 없는 상태. 그렇게 연휴의 마지막 날인 오늘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침대에서 기어 나와 저녁을 먹자 불쾌한 포만감에 비 오는 거리를 걷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옷을 챙겨 입고, 우산을 든 채 집을 나섰다. 이사를 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목적 없이 동네를 산책하는 게 처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 갈 곳이 정해져야 집 밖을 나서게 됐을까. 어릴 때는 이유 없이 나가 목적을 찾고, 갈 곳을 고민했던 것 같은데. 

 김밥과 라면을 2,000원에 먹을 수 있던 분식집, 나를 따라 집까지 쫓아오던 놀이터의 모래들, 첫사랑과 아린 이별을 해야 했던 카페, 단돈 5,000원에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서비스를 넣어주던 노래방…, 다른 무언가에 자리를 비켜준 것들과 100원 200원짜리 불량식품을 사 먹던 초등학교 앞 문방구, 단짝 친구가 되어달라 편지를 썼던 친구가 살던 아파트, 20살이 되자마자 돌진했던 술집 거리, 오픈 기념으로 치킨을 한 마리씩 공짜로 나눠주던 치킨집…, 여전히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 

 눈 오는 날 길바닥에 드러누워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 않고 눈을 맞던 아이는, 나는 예쁘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아, 라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소리치던 꼬마는, 새벽 늦게까지 학교 놀이터에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어린 학생은, 매일같이 하교한 뒤 가게에 들러 엄마, 500원만! 외치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지난 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 여기저기 기억이 묻지 않은 곳이 없는 이곳으로 다시 왔을 때, 나는 어떤 인생을 살며, 지금을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는 또 얼마만큼 같고, 얼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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