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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Mar 27. 2022

그런 날


 그런 날이 있더라. 하루 동안 일어난 어긋난 별개의 일들이 하나의 어떤 일을 위해서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날이. 마치 오늘처럼.     


 평소였다면, 베이지색 바지를 입으려고 들었을 때 얼룩이 보였어도 그냥 입고 출근을 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진청색 바지로 바꿔 들었어. 이상하게도 오늘 그냥 그러고 싶더라.

 회사 대표님이 말 같지도 않은 일로 나한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때마침 연락도 잘 하지 않던 친구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내가 부고를 전해 들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가까운 을지로 쪽에 있지도 않았을 텐데. 참 신기하지. 어긋났던 오늘 하루가 다 너의 아버지 장례식장을 가기 위한 준비였다니.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야 하나 망설여지더라. 6년인지 7년인지 긴긴 시간 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았던 너와 나이기에, 불편하고 마주하기 싫은 학과 동기들이 있을지도 모를 곳이기에,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곳에 있을지 겪어봤으면서도,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더라. 하필 얼마 전에 H와 P를 만나서, P의 아버지 장례식장을 가지 못 했던 것이 못내 마음의 짐처럼 느껴지던 차에, 하필 또 그 부고를 P가 전해와서, 망설여졌음에도 나는 용기를 냈어.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 속에 어떠한 말이 오가고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그때의 네가 어떠했고 내가 어떠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말이야. 소식 한번 전해 듣지 못 한 오랜 시간의 긴 공백이 있었음에도, 그 장소가 너의 아버지 장례식장이었음에도, 우리는 어색함보단 서로 여전하다며 슬픔이 담긴 미소를 서로에게 지어 보였지. 세월의 야속함, 시간의 무정함, 그리고 삶의 비정함을 알아버린 빈 껍데기뿐인 입술의 모양으로.


 우리를 멀어지게 한 것이 무엇이었건 간에, 그게 대체 뭐라고, 그렇게 친하게 붙어 다니던 우리는 연락 한 통 없이 살아가게 됐을까. 있지, 사실은, 나는 네가 참 부러웠어. 너와 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갖고 살아왔어. 네가 그러하고, P가 그러한 것처럼, 굳세고 올곧은 사람으로. 하지만 나는 알다시피 비틀리고 뒤틀린 사람이라서,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었어. 내가 단번에 붙은 시험에 너희가 떨어졌을 때, 나는 내가 동경하던 모습의 너희를 부정하고 넘어뜨리고 짓밟고 나를 긍정했어. 진짜 못났지. 너희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니까, 빛이 나니까, 그게 부럽고 시샘이 났나 봐. 근데 나는 학과에서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그렇게나 가고 싶었던 사회 안에서도 역시 적응하지 못 하고 겉돌았어. 아마 내가 아닌 너희가 붙었다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적응하고 그 안에서도 잘 지냈겠지. 나는 알아. 너희 둘은 강인하고, 굳세고, 올곧고, 빛이 날 정도로 밝으니까. 나와는 참 다르게도 말이야.     


 한 발 앞서 네가 겪은 그 말로 다 하지 못 할 커다란 일을 치른 사람으로서, 네게 해줄 말들을 잔뜩 생각하며 갔는데, 예전 그대로의 내 모습만 보여주고 와버렸네. 사실, 근데 생각이 안 나. 나는 돌이켜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힘들어했었는데,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네 모습을 보니까, 정말 괜찮은 것처럼 느껴지더라. 분명 괜찮지 않을 텐데, 많이 아프고, 버겁고, 속상하고, 주저앉고 싶을 텐데. 근데 나는 알아, 긴 공백을 지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네 옆엔 네가 그렇게 입이 닳도록 자랑했던 이쁜 누나와 동생이, 그리고 네가 그렇게 강인하고 올곧을 수 있도록 길러주신 어머니가 있으니까, 너와 똑같은 성격을 가진 P가 곁을 지켜줄 거니까, 괜찮을 것 같더라. 너의 곁엔 언제든지 네가 기댈 나무가 되어줄 친구가, 형들이, 누나들이, 동생들이, 있을 테니까.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너는 잘 이겨내겠지. P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나는 말이야, 글을 썼어. 기댈 사람이 없어서, 기댈 수 있는 성격이 되질 못 해서. 슬픔을 견딜 수가 없어 억누를 수가 없을 때는 글로 토해냈어. 게워내고 게워내면서 일어났어. 어둡고 쓸쓸한 곳에서, 고독하게. 너는, 너는 그러지 마. 아니, 아마 너는 그럴 수 없을 거야. 스스로가,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 곧게, 꿋꿋하게, 잘 이겨 나갈 거야. 그럴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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