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미니멀리스트
아이를 낳기 전 나의 직업적 성공 외에 관심을 가졌던 것 중에는 미니멀리즘이 있다.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그 가치관은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듣기로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 주변에 물건이 많으면 그 물건들이 흔들리고 떨어지면서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어서 미니멀리즘이 시작됐다고 한다. 언제 지진이 일어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릴지도 모르는데 애초에 삶이나 죽음과는 상관 없는 물건이라는 것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참 현명하다고 느꼈다. 몸이 약한 편인 나는, 집요하게 효율을 따졌고, 미니멀리즘은 나에게 지극히 효율적인 가치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이끌린 이유는 그런 것이었고, 실생활 응용에 있어서는 조금 변질된 모습으로 즐겼다. 미니멀리즘 까페에 가입해 정리용품을 새로 구입하고, 좋은 물건과 좋은 소비를 위해서 숱한 연습 소비들에는 관대하게 넘어갔다. 한국에도 있는 서랍장을 조금 더 싸게 사겠다며 굳이 일본에서 서랍장을 이고지고 들고 오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여행에 가도 챙길 것은 내 몸뚱이 뿐이니 실수와 실패와 어리석은 행동도 좋은 경험이 됐다. 연습과정에서 실패한 물건은 미니멀리스트라는 핑계로 하루 한개 버리기를 실천하면서, 집을 예쁘게 꾸미고, SNS에 올리며 자족하는 시간을 보냈다.
포도가 태어나고도 한동안 우리 집은 꽤 예뻤다. 아이를 기다리는 임신 기간, 밤 외출을 즐기지 않는 대신 아기자기하게 집을 꾸미고 가구를 들어다 놨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첫째 포도가 태어나고나서도 아기가 집 인테리어에 끼치는 영향은 많지 않았다. 열 달 동안 내 배 안에서 살다 나온 신생아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도 내 배 위에서 종일 하루를 보내느라 집안을 꾸밀 시간은 예전만큼 많지 않았지만서도 말이다. 아이는 처음엔 장난감이나 인형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고, 예쁘게 꾸민 천을 잡아 뜯지도 않았다. 포도는 바운서 같은 부피 큰 육아용품도 필요 없었다. 내 배 위에 있는게 제일 좋았으니까. 대학 동기와 선배 언니를 거쳐 우리 집에 온 흔들말은 스티커 꾸미기를 할 정도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몇 번 탔고, 보행기는 스스로 걷는 훈련을 외려 방해한다는 육아 블로그를 봐서 처음부터 들이지도 않았다.
그러고보니 포도는 태어나기를 미니멀리스트로 태어났는데, 손녀 양육을 돕기 위해 여수에서 살림을 정리하고 올라오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어도, 애정과 관심은 오직 엄마에게만 있었다. 엄마 대신 먹이고 씻겨줄 이모님을 받아들이기까지 한달이상 걸렸고, 엄마 모유가 아닌 우유병이나 공갈 젖꼭지는 입에 넣자마자 뱉어버렸다. 아이는 오로지 엄마 만을 원했다.
내 아이는 소비광
한두해가 지나고 나는 내 딸을 너무 섣불리 판단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세상맛을 알아버린 포도는 그 누구보다도 소비광이었다. 큰 장난감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하는 뽑기라면 환장을 했다. 원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뽑기 기계 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원하는 것이란 분홍색인 것, 반짝거리는 것, 하트나 토끼와 관계된 것인데, 굳이 장르를 엄격하게 따지진 않았다. 자질구레들이 집안에 늘어나는 건 둘째치고, 물건을 버리지도 못하게 했다. 포도에겐 모든 것이 소중했다. 얼마를 주고 물건을 샀는지와는 상관없이 귀엽고 예쁜 것에 매번 감탄하고, 자꾸 보기를 원했다. 집안 구석구석에 포도 영역이 생겼고,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전시하기 위한 장난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기억력은 얼마나 좋은지. “엄마 그거 어디있어? 왜 지난 번에 내가 이마트 갔을 때 산 분홍색 그거.” 하고 물어봐서, 몰래 버리지도 못했다.
아이에게 엄마는 절대적 사랑인지라, 다른 누가 아니라 엄마가 버렸다고 하면 포도는 조금 슬퍼하긴 했어도 크게 화를 내진 않았을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포도의 물건을 버리지 못했다. 작은 동물인형들을 미끄럼틀 옆에 쭉 늘어놓고 차례차례 미끄럼틀을 타는 놀이터 놀이를 했던 기억, 1,000원짜리 목걸이 뽑기에서 분홍 하트 목걸이를 뽑기 위해 여러 번 시도하다가 결국 하트 목걸이를 손에 넣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던 기억, 어느 날은 갖고 싶던 토끼 뽑기를 한번에 뽑은 뒤 신이 나서 아빠 핸드폰으로 전화한 당찬 목소리. 그 기억들이 나에게도 소중한 추억이라서, 눈 딱 감고 정리할 수가 없다. 포도의 소유욕은 이번에도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