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인생은 실전이다!
“철학자들은 의미 없는 말, 헛소리나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파격적인 말은 과연 누가 한 말일까요? 바로 언어란 무엇인지, 철학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고민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입니다.
"무릇 말할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위와 같은 말을 한 이유를 하나씩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동글동글하고
녹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하는
달달한 과일
이것은 무엇일까요? (두둥!) 네! 바로 사과입니다! 처음 이 문제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바로 사과가 떠오르셨나요? 특징을 듣고 사과를 생각하기보다 ‘사과’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 특징들이 더 잘 생각나지 않았나요?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세상을 해석하고 상상하게 만들어 주고 ‘이름’이란 이러한 언어를 더욱 발전시킨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언어로 표현만 했다면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의 언어는 사물보다 사물의 이름을 표현하게 되고 들을 때도 사물 자체보다는 사물의 특징을 떠올리고 상상하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을 '그림 이론'이라고 표현하며 다음과 같은 설명 했습니다.
“세계를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언어 행위는 ‘이름 짓기’와 ‘관계 맺기’다. 우리는 세상을 이름으로 표현하고 관계를 통해 세상을 서술하고 인식한다. 즉 언어 없이는 세상도 없다. 때문에 세상을 해석하는 ‘생각’은 곳 철학이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이 생각의 한계 설정을, 제대로 된 논리적 언어 비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적인 문제들이 생겨난 것이다. ”
위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언어를 세 가지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참과 거짓으로 명확히 정의되는 ‘의미 있는 말’
참과 거짓으로 정의할 수 없는 ‘의미 없는 말’
단순이 ‘윙윙’,’딱딱’ 거리는 ‘무의미한 말’
이렇게 언어를 나눈 비트겐슈타인은 ‘의미 없는 말’, ‘명확하지 않은 철학’’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적이거나 수학적으로 증명된 말만 해야 할까요? 그럼 왜 과학과 수학은 우리의 삶의 의미를 설명해주지 못할까요?
이 외에도 문제점을 깨달은 비트겐슈타인은 새로운 주장을 이야기습니다.
“이 세상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 것이다. 이에 무조건 침묵한다면 세상은 과학자와 기술자의 세상이 될 것 또한 막연히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와 같은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의미 없는 말)는 애초에 논리적인 말이 아니라 비유적인 말이며 사실만이 존재해야 하는 ‘내’ 세계관(‘내’ 언어의 한계) 안에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전제로 모두가 사실만이 존재하는 세계관을 가진다면 언어는 획일화될 것이다”
토끼? 오리? 생각은 "자유"입니다. 보여지는 데로 믿으세요.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는 없지만 보여지는 것, 보여 줄 수 있는 것들을 신비로운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비로운 것들을 표현하는 행위를 '예술', '철학'등이라고 말했고 결국 ‘의미’, ‘가치’, ‘창의력’과 같은 것들은 오히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세상 밖에 있는 신비로운 것 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언어를, 신비한 것을 통해 얻은 거나 깨달은 자신만의 세계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갖고 놀이를 함으로써 각자의 다양한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다양한 놀이의 형태는 ‘논리적 언어’의 한계를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이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이 바로 ‘언어 놀이 이론’입니다,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며 이 같이 단지 보여지는 것들은 우리 또한 그저 보여주어여만 한다."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올바른 철학은 그저 보여주기만 해야 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여주는 행위가 발전한 예술이라는 행위가 올바를 철학을 사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순간 비트겐슈타인이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의 아버지 키에르 케고르의 명언을 떠올렸습니다
“철학자는 머릿속에 자신만의 궁전을 짓고 허름한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결국 철학이라는 것도 니체의 허무주의처럼 그 존재의 이유보다는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예술가와 같이 철학을 통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이 철학을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역설적으로 가치를 창출해 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철학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신중하게 철학을 사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그저 쉽게 쉽게 말하며 자신의 삶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인가요?
작가의 쉬는 시간
저는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하고 일상 속에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요즘 머리가 아픈데요ㅠㅠ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세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다양한 방법으로 '신비로운 것'에 자신에 생각을 섞어 여러분께 보여주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주위를 둘러보러 가기 귀찮다면 집에서 간식과 함께 영화나 드라마, 책 한 권 읽어보는 것은 강력 추천드립니다. 사실 저도 이 방법을 더 애용합니다) -작가 본인-
나, 나를 표현하는 가장 작은 단위
“생각은 철학이며, 말은 사상이다. 그렇기에 말을 가볍게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이는 곳 내 생각, 철학, 삶의 방식과 목표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억양, 언어, 말투 등등 자신을 표현하는 삶의 방식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단순히 ‘이게 내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은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해야 내 삶을 진짜 진지하게 임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고민해 보았습니다.
먼저 내 삶을 진지하게 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고민을 하던 중 우연히 일본의 ‘리갈 하이’라는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이때 주인공 변호사, ‘코미카도 켄스케’가 말한 대사가 저의 고민의 답을 찾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주인공 변호사:버릇없이 제멋대로 교활하고 더럽고 추악한 밑바닥의 쓰레기들 그게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상대 검사:그래서 그걸 이끌어내려고...”
주인공 변호사: 그게 틀렸다는 거야, 우선 거기서 내려와 자신도 밑바닥 쓰레기 중에 한 마리임을 자각하라고!
-중략-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 윈윈으로 만들고 싶다. 모두 어차피 네 개인의 욕망이고 너는 그저 작은 루저들을 잔뜩 만들어 너 혼자 위너가 되려는 거다!
주인공 변호사: 만약 네가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방법은 하나다. 추악함을 사랑해라
실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던 키에르 케고르의 명언 중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완전하게 건강한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잃어가는데 남에게 보이는 모습이 중요할까요? 프로이트 또한 인간의 본능이 타나토스적(파괴적), 에로스적(색욕적)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생존이 목적일 지라도 그 근본은 비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한 추악한 모습일지 모릅니다. 드라마 속 검사처럼 자신의 추악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들만 보며 남들의 추악함을 선하게 만들려는 것 자체가 이미 추악한 것일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주인공의 말이 와 닿았습니다.
"자신의 추악함을 사랑하라, 자신의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솔직해져라. 자신의 단점 조차 사랑해라, 너 자신을 사랑하라"
저는 주인공의 말을 이렇게 듣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의 삶’,’ 나의 인생’에 있어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삶을 진지하게 사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나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 나의 언어’의 대하여 진짜 나를 표현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내가 하는 말이 아닌 ‘나 자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의 의미,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
‘나’의 인생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고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삶의 목표’, ‘삶의 의미’ 등을 고민하는 행위라며 옛날부터 정의되어있는 철학(삶의 의미, 진리)이라는 행위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이미 하고 있는 행위일지 모릅니다. 이러한 생각은 꽤 긴 시간 동안 제 머릿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뒤집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철학이 삶의 의미(이유)를 찾는 행위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설명하거나 찾기 위해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사유'를 논리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고, 정말 이러한 이유로 철학을 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하여 설명하고 싶어 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기존에 제가 정의 내린 철학은 ‘세상에 물음을 던지는 행위나 이를 통해 얻은 답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물음을 실험을 통해 발견하는 학문을 과학’, ‘계산을 통해 답을 구하고 식을 통해 활용하는 학문을 수학’, ‘물음을 찾아내도록 시야를 넓혀주는 학문을 사회’, ‘이를 언어로써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학문을 국어’, ‘찾은 답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행위나 학문을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물음’이라고 결국 이러한 '물음'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인생에 대한 물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고 답을 찾기 위해 생겨난 여러 학문들이야 말로 비트겐슈타인이나 키에르 케고르나 다른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한 철학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직접 체감하시듯 완벽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저 또한 모르는 학문이 많고 부족한 점이 많으며 추악한 모습 또한 존재하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를 표현하면서도 삶을 진지하게 사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학문을 공부하고 지식을 쌓는 것은 확실히 철학을 하는 데 도움을 주며 이는 우리의 삶을 보다 진지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학문을 좋아하거나 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러한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보다 이기적으로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할 수 있는 학문이나 분야를 찾거나 발견 혹은 창조하여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며 동시에 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모두 합쳐 나만의 철학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학문, 분야, 직업을 찾거나 열정적으로 임하며 끊임없이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것”
이 아닐까 조심스레 이야기해봅니다.
예술가의 삶, 내 삶이 철학이었다
제가 철학을 사는 법을 고민할 때 이미 철학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지 고민해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생각난 ‘예술가’를 찾아보았습니다. 만화가, 화가부터 래퍼에 타투이스트까지 연락이 닿을 수 있는 예술가 분들을 찾아 인터넷을 뒤적였고 실제로 연락 또한 보냈습니다. 그 결과 딱 한 분의 타투이스트 선생님과 인터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억에 남는 질문과 대답들을 해주셨습니다.
Q: 삶이 즐거우신가요? 선생님은 자신의 철학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저는 그림이 일상이고 직업이고 취미예요.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그림이고 그림이 곳 제 삶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 말을 듣고 얻어맞은 듯한 가슴속 울림을 경험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웠지만, 논문과 교과서로 철학을 공부만 하던 제게는 철학을 사는 것을 넘어 철학의 원동력인 자신의 관심사가 곧 자신의 인생이라 말씀해 주신 선생님의 삶의 무게는 제가 경험해본 사람 중 가장 크고 무거우며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명언들은 저에게 더 많은 충격을 선사해 주셨습니다.
“현재에 살면서 현재를 살고 과거를 통해 배우고 미래를 계획한다”
“남을 위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요”, “네가 남이 되려 하지 마라”
“늦게 폈다고 꽃이 아닌 게 아니다.”
“떳떳하지 못해서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키에르 케고르의 명언 목록이 떠올랐습니다.
“인생은 뒤를 돌아보며 이해하고 앞을 보며 나아가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갈고닦아서 예리한 조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존재이지 모서리를 깎아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
“투쟁하는 자가 멸망하느냐 일어서느냐는 자신의 가능성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렸다.”
선생님의 말씀들은 정신 놓고 듣다 보면 키에르 케고르가 겹쳐 보이기도 하였고, 제 나이를 밝혔음에도 존댓말로 저를 존중해 주실 때는 비트겐슈타인 또한 겹쳐 보였습니다. 저의 과대망상일 수도 있고 굳이 예술가가 아닌 다른 사람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생각이 아닐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철학을 직접적으로 공부하지 않으셨음에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고 이야기할 수 있고 행복과 만족감 또한 느끼시는 선생님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임하고 있으시고 좋은 철학을 살고 계신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철학을 살고 계신 분을 통해 철학을 사는 저만의 방법이 옳은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물론 이는 제 ‘철학’이지 ‘사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 글을 읽고 여러분이 여러분만의 철학을 사는 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단 여기에 몇 가지 말을 덧붙이자면 키르케고르가 말한
“투쟁하는 자가 멸망하느냐 일어서느냐는 자신의 가능성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렸다.”
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결국 자신의 지식을 탐구하든 삶을 표현하든 결국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삶에 대한 의지가 있나요? 자신을 사랑할 의지가 있나요? 저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취미로 철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저의 인생과 철학에 도움을 주신 타투이스트 '한지' 선생님께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