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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숲 Jun 16. 2024

기다림의 시작

저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다.


는 목소리가 내 속에서 울렸을 때, 그 소리를 들은 건 나뿐임에도 얼굴로 뜨거운 피가 올라왔다. 그건 사랑이나 끌림 보다도 먼저이거나 적어도 동시에 찾아온 것이었다. 생명의 본능, 유전자의 부르심이었을까?


어느 멋진 여성과 나란히 서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는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딸도 있었다. 스스로도 황당하고 낯뜨거운 목소리였다.


살아오는 동안 몇 번의 연애를 했고 여러 차례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한번도 이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실은 좀 우울했다. 이 남자가 내 남편될 사람이라니… 내 편에서든 상대 편에서든 누군가가 먼저 헤어짐을 말했는데, 극심한 슬픔을 겪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깊이 안도하는 이별들이었다.


아이를 셋 낳고 싶었다. 언니와 오빠와 내가 셋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투기도 많이 했지만 우리는 안팎으로 말했다. 우리가 셋이라 정말 좋다고. 어릴 때 언니는 오빠와 나를 떼어놓고 세상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말 통하지 않는 어린 동생들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자기 세계의 일원으로 그들을 받아들였다. 금요일 밤이면 우리는 각자의 일정을 마치고 교회 철야예배당에서 만났다. 예배를 마친 자정 즈음 당시만 해도 밤새 운영하던 킴스클럽에 가 과자들 몇가지를 사와 펼쳐놓고, 밤이 새도록 두런두런 무슨 얘기를 나눴더라. 그런 우리가 완벽하다고 느꼈던 것은 기억난다. 우리 중에 언니가 없는 것도 오빠가 없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이는 셋이어야 했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는 결심은 생활 습관 같은 걸로 시작해 아주 사소한 일부터 내 삶을 지배하는 아주 큰 결정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소한 일이란, 일테면 운전이나 라식 수술 같은 것이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만나는 어린 아이를 둔 엄마들은 버거워보였다. 배 나온 임산부들도 많이 힘들어보였다.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집집마다 한 대씩은 꼭 있는 차가 우리 집엔 없었기에 내 차를 갖는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어떻게든 임신 전에 운전을 마스터해야 했다.


중학생 때부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해 고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안경 없이 칠판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도 안경이 싫어 평소에는 흐릿한 세상을 살다 수업을 들을 때나 영화를 볼 때만 안경을 썼다. 조금 불편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서른이 되던 해 라식 수술을 했다. 나는 엄마가 될 거니까. 아이가 자는 나를 깨울 때 아이보다 안경을 먼저 찾고 싶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세상의 아주 작은 것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고 싶었다.


인생의 굵직한 경로를 정할 때도 생각했다. ‘나는 엄마가 될 거니까.’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어떤 힘 있는 조직의 일원이 되기 보다는 힘 있는 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힘 있는 한 사람이 되면 시간을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심, 세상의 법과 틀이 아직 작동하지 않은 아이에게서 창조적 영감을 얻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기도 했다.


숱한 엄마와 아빠들은 많이 바쁘고 힘들어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를 여럿 돌보는 일은 죽도록 힘들지. 하지만 하나를 돌보는 일도 죽도록 힘들어.” 아이를 함께 키우고 돌보는 엄마아빠들의 연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로 돌아가며 돌보면, 그 순간만큼은 죽도록 힘들더라도 나머지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려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작업실을 열어 낯선 사람들을 맞이했다. 어떤 사람과는 잘 맞지 않아 힘들고 어떤 사람과는 함께하는 게 즐겁고 힘이 났다. 누군가하고 관계가 힘들 때는 스스로를 탓하는 게 늘 먼저였는데,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무엇때문에 힘든지 무엇때문에 즐거운지 따져보며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에겐 무엇이 잘 맞는지 알게 됐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관념이나 이상이 아니라 현실 여기에서 이루고 싶었다. 정성을 다했던 신앙생활에 갖게된 의문은 곧 한계가 되었다. 성경은 늘 천국은 이미 여기에 있다고 하는데 교회는 자꾸 내 마음의 천국, 죽음 뒤 보상으로서 천국 만을 말했다. 정신승리 같았다. 목사님에게 따져묻고 또래 친구들하고 공부하고 실천하고자 애썼지만 자주 외로웠다. 녹색당을 처음 만났을 때, 천국을 이 땅 위에서 이루려 하는구나! 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녹색당 당원들 중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있다’ 한 예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이상을 현실로 일궈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는 동안 하나둘 나이가 보태어졌다. 꿈꾸던 많은 일들은 크고작은 성취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만나는 일은 사람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건 내 능력을 벗어난 영역의 일이었다. 타인을 움직이는 일, 생명을 내놓는 일.


마흔이 다 되어버렸던 어떤 날에 간절히 바라면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거라 결코 믿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좋은 친구 사이로도 충분하다 여겼는데, 그는 연인을 넘어 결혼과 아이에 대해서도 말을 꺼냈다.


오래 간절한 바람이었음에도 나는 어느사이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사는 삶에 맞춰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사이 십수 년전 라식으로 교정한 눈은 노안을 맞아 흐릿해지기 시작하고 일은 나의 하루하루를 꼭꼭 묶어 휴일까지 장악해버리는 날이 많았다. 공동체는 커녕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지 오래. 일터의 동료들과 고객들과의 관계만 얕고 넓게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과신했던 건강도 임신과 출산 앞에선 그다지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오직 나이가 중요했다.


많이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기로 하며 지나간 날의 소원들을 들춰본다.


지난 월요일 첫 시험관 아기 시술 실패 결과를 받았다. 앞으로 몇 차례의 실패를 하게 될까? 40대 시험관 성공률이 10퍼센트 대라고 하는데, 열 번을 실패하고 나면 아이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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