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앤 더 4티> 프롤로그
“원뿔 한우고요, 미경 암소입니다.
‘미경’은 새끼를 한 번도 낳지 않았단 의미고요,
그래서 육질이 아주 부드럽습니다.”
평소엔 없어서 못 먹는 육사시미를 앞에 두고 우리 셋은 얼어붙어버렸다. 거세 수소는 들어봤어도 미경 암소는 생경했다. 그렇다면 미경의 경은, 아마도 ‘월경(月經)’의 ‘경(經)’…?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가임기 여성이 매달 경험하는 생리적 현상 월경과 한 번도 송아지를 낳은 적 없는 소에 붙이는 미경(未經). 어쩐지 기괴했다. ‘육식주의’에 가까운 입맛에 (잠시나마) 제동이 걸리는 기분.
영화인 E의 크랭크업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출산을 경험한 나와 A는 오늘의 주인공에게 기꺼이 첫 젓가락을 양보했다. 먼저 들어, 비싸고 육질 좋은 미경 암소라잖니… 비혼 무자녀 여성 E는 잠시 주저하는 듯했으나 이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맛은 있네… 영화 <워낭소리>와 <옥자>를 봐도 결국 채식은 하지 못하는 유자녀 여성 둘도 한 점씩 먹었다. 그래, 맛은 있네. 그런데 말이다. 육질이 뛰어난 미경 암소를 먹으며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유경 여성이니, 미경 여성이니?
자리를 옮겨 E의 집에서 2차. 나와 A는 홈파티를 한다면 스무 명도 넘게 초대할 수 있는 거실을 보며 감탄했다. “이 집 거실 ‘한가로운’ 것 좀 봐!” 얼핏 보면 누구나 꿈꾼다는 미니멀리스트의 공간이었다. 실상은 촬영 기간엔 거의 집 밖에서 사는 바쁘고도 게으른 인간이 이사한 지 1년이 넘도록 짐 정리를 못해 방 하나는 창고처럼 쓰고 있었지만.
이 집엔 ‘여백의 미’가 있었다. 안방 침대 옆에 깔고, 거실 소파 앞에 깔고, 심지어 벽에도 걸어놓은 커다란 카펫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주 호사스럽구나, 카펫 성애자라니!
문득 궁금했다. 내가 현재 비혼이라면, 여전히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면, 마흔의 나는 이렇게 거실이 한가로운 집에서 살고 있을까? 그때 A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나와 비슷하게 말수가 줄어든 채 집안을 둘러본 걸 보면,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나도 A도 방 2개, 욕실 1개인 14평형 집에서 나날이 증식하는 애들 물건 때문에 테트리스 실력만 늘어갔으니까. 우리는 집들이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거실이 우리 집보다 넓구나!”(앞으로 모임은 이 집에서 하자, 애들이 뛰어 놀기 좋구나!)
뉴욕에 사는 M과는 영상 통화로 연결된 상태로, 20대 때 연남동에서 함께 살던 넷은 간만의 회포를 풀었다. 미경 암소에 얽힌 슬픈 사연(?)으로 시작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임신 출산 육아로 이어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덧 마흔이 된 우리는 임신 출산 경험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됐다. 자연 임신해서 제왕절개로 출산한 A, 체외수정으로 임신해 제왕절개로 출산한 나, 체외수정을 시도 중인 M, 그리고 졸지에 ‘미경이’로 개명한 E…
기혼 미경인 M은 ‘미경이’에게 난자를 얼리라 했다. ‘미경이’는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닌지 별말 없이 고개를 저었고, 옆에 있던 기혼 유경이들은 달래듯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우린 존중해”라고 했다. 그래 놓고 “근데 굳이 안 해도 돼”라고 덧붙이는 걸 보면, ‘걱정해서 하는 말’은 결국 ‘내가 못한 거 너라도 좀 해!’라는 압박에 가깝다.
오랜 친구들의 다정한 참견에 묵비권으로 버티던 ‘미경이’는 참다못해 말했다.
“얘들아, 내가 알아서 할게? 이제 그만!”
덧. 찾아보니 ‘미경 암소’의 정확한 표현은 ‘미경산우’.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한우 암소는 새끼를 2~3마리 낳은 생후 50개월 이하의 ‘경산우’, 그보다 많은 새끼를 낳은 소는 ‘다산우’로 분류한다. ‘거세 수소’와 달리 ‘미경산우’는 현재 국내 소비자가 확인할 수 있는 표기가 따로 없는 상황이라 한우협회에서는 미경산우 표시제를 도입 준비 중이다. 일본의 경우 표기가 의무는 아니지만 미경산우를 구분해 출하하고, 미경산우 브랜드도 따로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