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제이 Aug 16. 2022

올드카 드라이버를 꿈꾸는 이들에게

  삶의 거창한 발걸음을 내딛으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대체로 끊임없는 발전과 진보를 강요받는다. 오늘은 어제보다 나아야 하고, 다음 승진평가에서는 반드시 진급해야 하고, 이직할 때는 연봉이 올라야 하고, 새 집은 헌 집보다 넓고 좋고 비싸야 한다. 서구 세계가 수백 년에 걸쳐 이뤘던 성장을 불과 1세기도 안 돼 이룩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풍조가 더욱 심하다. 마치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것이 미덕인 양 우리는 매일마다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물질적 진보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감히 단언하건대 철학 없는 진보는 공허하기만 하다. 오늘날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한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좇아봐야 자고 일어나면 헌 것이 되기 일쑤다. 자신의 취향, 목적, 이념에 대한 고찰 없는 변화는 결국 삶을 피로하게 만들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회의감과 더불어 소위 말하는 '현자타임'만 가져오기 마련이다. 마치 표적 없는 화살이 땅으로 떨어지듯, 목적 없는 진보의 종착점은 허무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공허함을 무찌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잘 나가는 강사의 인문학 강의라도 들으면 좀 풍족해질까? 일시방편이 될 수는 있겠지만 단순히 잡학다식을 주입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런 다양한 삶의 양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삶의 목적을 고찰하고, 나만의 '갈피'를 잡아야만 물질적 진보의 공허함을 달래고 풍요로운 인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올드카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눌렀는데 초장부터 대관절 웬 선무당 잡는 소리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필자는 대단한 철학자도, 인문학자도 아니다. 스스로도 그런 공허함 속을 헤매는 현대의 표류하는 청춘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올드카를 탄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의 일상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자동차에 관한 한 공허함을 달래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 좋은 방편이 돼 준다.


  올드카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매일같이 정비소에 눌러앉아 차를 고치느라 바쁜 사람도 있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올드카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올드카의 멋과 감성에 취해 홍대와 연남동 거리를 거닐기 위해 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5년은 기름만 넣고 타도 되는 요즘 차를 타는 사람들에겐 이 모든 게 미련한 '사서 고생'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어떤 형태로 올드카를 향유하든 자동차, 더 나아가 이동성에 관한 한 올드카 오너들은 나름의 기준을 정립하고 그에 맞는 삶의 양식을 찾아가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올드카를 모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 구조가 단순해서 고칠 것도 없다는 말은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이 든 반려동물처럼 끊임없이 오너의 애정과 손길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시간과 노력, 정성과 자본이 투입된다. "내가 타는 차는 이래야 한다"는 확고한 고집 없이 덤볐다가는 앞서 이야기한 공허함과 현자타임에 더 지독히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련을 모두 넘어섰을 때 올드카는 일상적인 도로 위의 시간들을 세상에서 가장 멋스럽고 낭만적인 여정으로 바꿔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차에 담긴 개발자들의 철학, 타협하지 않는 당대 최고의 기술에 숨겨진 엔지니어의 고집, 지금보다 모든 붓터치가 자유분방했던 시대 디자이너들의 감각은 잿빛 도로 위에서 나의 색깔을 가장 오롯이 표현해 줄 수단이 된다.


  21세기 자동차 산업은 삭막하다. 우리나라에만 2,400만 대 넘는 차들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고, 매년 수천만 대의 신차가 생산됨에도 자동차의 미래는 환경규제, 안전규제, 공유경제 따위에 밀려 암울하기만 하다. 오늘날의 차가 과거 어느 때보다 진보했음에도 과거 어느 때보다 시시하고 설레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렇게 저물어가는 자동차의 시대에서, 과거 영광의 시대에 탄생해 수십 년 간 도로를 달린 차와 함께 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 특별한 경험을 하기 위해 우리가 현실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경험을 하는 이들이 느끼는 올드카의 매력과 단점은 무엇인지, 앞으로 차근차근 글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여기에 공감해 올드카를 사러 갈 수도, 혹은 필자의 이야기를 약장수 놀음 정도로 치부해 코웃음 칠 수도 있다. 그저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 준다면, 그로 말미암아 당신의 삶에 조금 다른 액센트가 더해졌다면 그것으로 족한다. 진지하게 올드카 오너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공허하지 않은 삶의 갈피를 잡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2020년 5월 13일, 제주도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