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할 건 해야 한다.
마음을 벼려낸 구구절절 설명은 좀 구차한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한 바를 글자로 풀어내는 능력도 요새는 그만 휴업하신 듯하여 좀 에둘렀다.
그런데 이제는 마지막 날이라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꼼짝없다.
꼼짝없다니?
고흥의 사도/오취마을에 올 때의 마음이 딱 그러했을 거다.
꼼짝없이 해야 하는 일들과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애중 간한 11월이 되면 업으로 하는 일들은 매듭이 지어져 가고 + 새삼 모든 것들이 약간 성가시면서 + 2023을 그만 조기마감해 버리고 싶은.
유자향을 생각했던 마을에서는 바다를 힘 껏 농축한 굴 내음이 진동했고 사방에 굴 무덤이 그렇게나 많은데 걸어 다니는 사람은 하루에 네 명 정도가 최대. 무슨 인터뷰를 한다고 했었는데 여기 사람이 살긴 사는 걸까?
새로운 곳에 가면 늘 그곳의 시간차와 온도-특히 사람의 온도-를 각인하는 나는 이틀째에 시차적응을 끝냈으나 온도는 아직이었다. 도무지 사람과 마주해 이야기할 일이 없었으니까. 그 흔한 슈퍼, 분식점, 세탁소도 없었다. 아니 사실 굴막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도/오취마을은 그런 곳이었다.
오늘은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날. 내가 하려던 질문은 ‘00님에게 굴은 무엇인가요?’와 ‘이 마을이 어떻게 변하면 좋겠냐’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진정성까지 의심되는) 내용이었다.
첫날부터 궁금했던 여 노인정에 방문했다. 이야기고 뭐고 딱히 할 것도 없다고 손사래 치는 할머니들을 웃음으로 방어하며 엉덩이를 들이 밀고 앉는다. 아직 아무런 대화도 시작하지 않았지만 스물한 그루의 단단히 여문 눈빛들 속에서 이들의 지난한 세월이 한 코씩 읽힌다. 지금 우리에게 질문이라는 것은
과연 필요할까?
오히려 손이, 발이, 얼굴이, 발목이 다 늘어난 양말이 나는 만지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누군가 젊은 시절이 그립지 않으신지 물어보자
"젊음은 안 달아와(돌아와)- 안 달아오는 것을 머더러 그리 버서 살겠어. 우리는 호자잉게(혼자니까). 여기 다 호자잉게 이라고 그냥 매일 노는 거지”
살아온 세월이 살아갈 날들을 한참 덮은 할머니들은
당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뭐가 있는지 아러야 하고도 싶은데, 뭐슬 할 수 있는 지를 몰라. 우린”
이후로 무슨 대화들이 꽤나 오갔다. 여기 슈퍼는 도대체 왜 없어졌는지, 아흔이 넘으신 할머니가 참 정정하 달지, 아들내미는 찾아오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오랜만에 노인정은 북적였다.
사실, 나는 이 북적임이 싫다. 왁자지껄한 방문 뒤에는 의례히 찾아오곤 하는, 다시 와 채워주리라 약속도 못 할 곱절의 공허함. 든 자리보다 커질 난 자리를 생각하면 애초에 떠들썩하게 든 자리를 만들기가 싫은 느낌이라 해야 할까. 뭐 그런 종류의 복잡하고 각이 진 감정들로 대화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했다.
슬슬 허리가 아파 오기도 하고, 있은지도 오래되어 자리를 마무리하고 나오려는데 말하는 것을 다 잊아부렀다며 말씀을 아끼시던 할머니가 나의 계산적인 손등 위에 손을 차곡하게 덮으신다. 으응, 잘 가. 잘 가.
아차…
안됩니다 할머니, 이러면 제 손이, 제 마음이 차디찬 게 들통나 버리잖아요. 제가 괜 시 정들까 봐 눈도 오래 맞추지 않던 게, 혹여나 또 오라고 하실까 봐 웃으며 성급히 일어난 나쁜 사람인게 들켜 버리지 않나요. 이건, 이 따뜻하고 갑작스러운 손은 저는 너무 곤란해요.
라고 생각하며 한 손을 더 얹는 나.
감사합니다. 할머니. 건강하셔야 해요.라고 미지근하게 말하고 신발을 꺾어 신는 밖에는. 이제는 철없던 시절처럼 ‘또 온다’ 거나, ‘다시 뵈어요’ 같은 백지 어음은 발행하면 안 되니까. 나는 쉬이 쓴 편지지만 그네들은 또 곱씹고 또 곱씹을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 우리 할머니도 나의 그 말을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곱씹고, 또 올 거라고 믿다가 고만 못 기다리고 가셨다는 걸 이제 아니까.
할머니들의 손을 잡으며
여전히 서툴게 안녕을 고하며
추스르지 못한 감정과 옷깃을 같이 여미며
마지막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지
이 글의 마지막을
2023의 마지막을
나 역시 언젠가 꼼짝없이 마주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영겁의 시간을
2023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