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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영 Oct 05. 2024

2024년 7월 19일 산책일기


호르몬에 지배당해 며칠 내내 누워있다가 오늘은 나가야겠어서 집을 나섰다. 습도가 높긴 했지만, 선선했고, 역시 나오니까 좋았다. 항상 나오기까지가 힘들지 나오고 나면 항상 좋다. 




우리집 앞 온천천에는 천변을 따라 양쪽으로 길이 나있는데 왼쪽은 좁고, 오른쪽은 자전거와 보행자가 함께 사용할 수 있어 더 넓다. 즉흥적인 성격인 나는 기분 따라 선택하는 걸 좋아한다. 오늘은 왠지 왼쪽이다. 좁은 길을 선택해서 걸었다. 조금 걸었을까. 앞서 걸어가던 어머님께서 다시 되돌아오시는 걸 봤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왜지? 어머님이 돌아오신 길을 보니 한 이십여 마리 오리들이 길을 점령하고 있었다. 










본인이 지나가면 쉬고 있던 오리들이 날아갈 걸 알기 때문에 어머님은 되돌아오신 거였다. 오리들에게 점령당한 길을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방해하지 않겠다 생각한 어머님의 마음이 따숩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을 내어주었기에 저렇게 편하게 쉬고 있는 거겠지. 이쪽 길이 공사 때문에 두 달 정도 차단되어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았더니, 오리들이 여기까지 쓰기로 했나 보다. 암묵적으로 오리는 온천천, 사람은 산책로 이렇게 구역을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오리들이 구역을 넓힌 것 같다. 사실 온천천 전체를 오리들이 썼었는데 사람들이 양쪽으로 길을 내서 그들의 구역이 좁아진 거니까. 갑자기 미안하기도 하네. 같이 쓰자. 자연에 니꺼 내꺼가 어디 있겠어. 이렇게 우리 다 같이 쓰는 거지.










얼마 전에 시선님 산책 사진에서도 붉은토끼풀꽃을 봤는데, 우리 동네에도 토끼풀꽃이 피어 있었다. 토끼풀꽃을 보면 두 사람이 떠오른다. 송영관 사육사님과 엄마. 송영관 사육사님은 푸바오가 중국으로 가기 전에 추억이 담긴 토끼풀꽃 화관을 만들어주고 싶어 하셨다. 빨리 피기를 바랄 때는 안피어서 결국 선물을 하지 못했었는데, 아직까지 이렇게 피어있다니. 송사육사님도 아마 토끼풀을 보면 푸바오 생각이 나시겠지. 엄마와의 추억이라고 떠올릴만한 게 잘 없는 편이다. 근데 엄마가 어느 공원 풀밭에서 토끼풀꽃으로 팔찌를 만들어줬던 건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토끼풀꽃을 보면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의 팔찌도, 사육사님의 화관도 다 사랑의 표현이었겠지. 내가 아이를 낳게 될지, 엄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소중한 사람에게 토끼풀로 반지, 팔찌를 만들어주고 싶다. 나도 엄마처럼 기억될 수 있겠지. 문득 엄마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걷다 보니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진다. 하나 둘 맞는데 '빨리 들어가야지'가 아니라 '이대로 쏟아져도 좋겠다' 싶다. 기분이 좋다. 무더운 여름에 소나기 한 번 흠뻑 맞아보는 것도 좋지. 










예쁘게 피어있는 붉은빛 인도칸나 옆에 못 보던 게 보인다. 








꽃이 진 자리에 생긴 열매인가 보다. 처음 봤을 땐 보송보송한 털 뭉치 같은 느낌일 줄 알았는데, 만져보니 딱딱하고 뾰족뾰족한 돌기가 나있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맥문동도 만났다.




조금 더 걷다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부부를 봤다. 남편분이 아내분에게 한쪽 손을 뻗길래 손을 잡으시나 했는데 아내분은 당연하게 수건을 건넸다. 내가 너무 로맨틱했던 건가. 생각해보니 이런 게 부부인 건가 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 이미 충분히 사랑하는 사이라 로맨틱하게도 느껴진다.










걷다가 반환점을 돌기 위해 돌다리를 건넌다. 가끔 빠지면 어쩌나 싶을 때가 있지만 다행히도 아직 빠진 적은 없다. 돌다리를 건널 때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물의 흐름을 따라 흐르는 바람이 분다. 중간쯤에서 잠시 바람을 맞고 선다. 산책의 행복 포인트 중 한가지다. 이렇게 더운 날엔 옆으로 지나가는 분이 만들어주는 바람도 시원하다. 오늘만 해도 스무분 가까이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주셨다. 감사합니다. 세상에 감사할 일이 정말 많다.










아니, 아까 소나기를 맞아도 좋겠다는 내 마음을 하늘이 들은 건가.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모자도 없고, 우산도 없고, 가릴 것도 없어서 그냥 맞았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으면 뭔가 더 자유롭고 강한 인간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비 이까짓 거 맞으면 되지. 비 따위가 나를 막을쏘냐. 많은 나라에서 비가 올 때 우산을 잘 안 쓴다고 하던데, 이런 마음을 느끼는 걸까. 우산을 쓰고 비를 맞으면, 세상과 내가 우산으로 단절되는 느낌인데 비를 맞으면 세상과 하나되는 느낌이다. 잠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기분. 좋다.







촉촉하게 비를 맞은 풀들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노란 꽃. 달맞이꽃으로 추정.







두꺼비가 자주 출몰하는 구역을 지나가는데 두꺼비 한 마리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자전거와 사람이 모두 지나는 길이라서 위험해 보였다. 이미 오는 길에 밟혀 죽은 두꺼비를 본 터라 지켜주고 싶었다. 풀 쪽으로 가도록, 풀 속으로 숨도록 계속 유도를 했는데 내 맘 같지 않았다. 두꺼비 인생이 의미 있어봤자 얼마나 있을까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의미 없이 밟혀 죽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 사람이고 동물이고 소중한 모든 생명은 그렇게 사그라지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을 오늘도 내어본다.














은폐엄폐 잘해서 살아남자 두껍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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