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의 조커
베니스 영화제는 영화 '조커'에게 황금사자상을 안겨줬지만, 현실의 조커들에게는 황금개미조차 보내주지 않았을 겁니다.
현실의 조커들은 심사위원들의 미래나 희망과는 관련이 없으니까요. 그들은 우열의 지도에서 심사위원들보다 한참이나 밑에 있습니다. 돈이 되는 예술적 작품들만이 심사위원들의 희망과 관련이 있죠.
하지만, 황금사자상을 받은 이 영화 속에서 못된 인간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불가피하게 '조커'가 된 아서도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는 없으며, 선악의 기준점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도 토마스 웨인이나 머레이처럼 보다 확장된 미래를 위한, 더 큰 희망을 위한, 집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만일 그가 보다 확장된 미래가 아니라 자기보다 밑에 있는 자들과 연합하려는 생각을 우선으로 했다면, 코미디 클럽을 찾아가기 이전에 난장이 동료에 대한 배려를 먼저 실천했어야 합니다.
(아서는 성공에 대한 열망, 온 세상의 자기화에 대한 열망은 너무나도 큰데 반해서, 주위 여건은 너무나 열악하기에, 여기에서 더 극적인 코미디가 발생하는 듯합니다.)
난장이 동료는 아서가 다른 동료를 잔인하게 살해한 현장에서 겁을 먹고(물리적인 싸움에서 아서와 상대가 되지 않을 걸 알기에 더 겁이 났겠죠.) 그곳을 도망치듯 떠나려 하지만, 키가 작아 현관 자물쇠를 열 수가 없어 아서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서는 그가 유일하게 자기에게 잘 해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선심 쓰듯 그를 보내주죠. 그런데, 여기에도 코미디는 있습니다.
세상의 바닥에 있는 자처럼 묘사된 아서조차도, 난장이 동료보다는 위에 있습니다. 물론 학대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정신 질환으로 온갖 오해에 시달려 온 아서도 끔찍한 시간들을 견뎌내야 했겠지만, 그조차도 난장이 동료가 어떤 굴욕을 겪으며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짐작도 하지 못할 겁니다. 아서는 물리적으로 난장이 동료보다는 우월하기 때문이죠.
난장이 동료에게는 다른 모든 동료가 우월해 보이기에, 그들 모두를 연합의 대상으로 바라봤을 겁니다. 그래서, 그에게 특별히 못되게 굴지 않는 한 모든 동료에게 친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착한 아서조차도, 혹시라도 자기 집을 방문할지도 모를 난장이를 위해 일부러 문고리를 밑으로 옮겨 달 시간은 없으며, 평생 동안 현관문을 닫을 때마다 문고리를 걸기 위해 허리를 숙일 불편을 감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다 확장된 미래, 좀더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움직일 때만, 시간을 견딜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언젠가 난장이가 총을 들고 조커를 찾아 온대도, 그는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난장이 동료가 조커를 위해서 정성스럽게 만든 케이크를 들고 찾아 온대도, 만일 그 옆에 머레이가 있었다면 조커는 그에게 정신이 팔려 난장이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테죠. 그래서, 조커에게 있는 코미디는 난장이 동료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웨인이나 머레이에게도 코미디는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서가 머레이를 비난할 때, 머레이도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어쩌면, 그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정신질환을 앓은 전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런 고통이 견딜 만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의 정도 차이가 있겠죠.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서는 순간적으로 문학 소년이나 문학 소녀가 되어 시적 허용을 감상하려 하죠. 왜냐하면, 인간은 보다 확장된 미래를 위해서 달려갈 때만이 시간의 고문을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조커들이 있고, 수많은 난장이들이 있습니다. 난장이 동료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우리는 당장 문고리를 밑으로 옮겨 달아야 합니다. 겨우 이 정도 수고도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심지어는 내 몸처럼 사랑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가 우리에게 새로 준 신약 시대의 계명은, 어찌 보면 그전에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십계명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영화 속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조커들이 부자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았다면,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영화를 살펴 볼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부자가 된 조커들에게도 문고리를 밑으로 옮겨 달 시간은 없습니다. 언제나, 보다 확장된 미래를 위해 움직이지 않으면, 시간의 고문이 들이닥치기 때문이죠. 더 신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이 없으면, 값비싼 와인을 마시면서 나는 너무 우울하다고 SNS에 글을 올릴 것입니다.
조커는 지금까지 단 1분도 행복한 시간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1분이 넘도록 나는 지금 행복하다는 생각을 지속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조커와 나란히 정신병동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1분도 안 되어 행복한 순간은 이내 잊고 심심이라도 호출하게 되겠죠.
조커가 말한 행복한 시간이라는 건, 작은 희망이라도 가지고서 절망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부자들은 조커들보다는 안락한, 즉 절망에서 벗어난, 어찌 보면 행복한, 그런 생활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돈은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에, 부자들은 여기에 희망을 걸고 시간의 고문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면 절망에서 벗어난 상태에 머물 수 있기에, 조커처럼 억지 미소를 지으려 입을 찢을 필요가 없죠.
행복의 요건은 기대감입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행복이며, 만약 선악이 존재한다면, 최고의 악은 남의 희망을 빼앗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최고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이며, 그 다음이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시스템은 다른 사람의 희망을 앗아가는 걸 허락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몸값을 좀더 크게 불리는 데에만 눈이 빨갛죠. 예수를 찾아간 부자 청년처럼 전 재산을 팔아 이웃에게 나눠 줄 수가 없습니다. 극히 일부의 재산만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는 도덕적 우월성마저 차지하려고 할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보다 확장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우리보다 밑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희망을 빼앗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몸값이 상승하면, 그들이 그만큼 추락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상대적 악마입니다. 저는 여기서 시적 허용을 불허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