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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Oct 02. 2019

흘러간 음악에서 찾는 행복

모처럼 아이들이 모두 일찍 잠든 밤, 남편은 회식이 있어 늦는다고 한다.

마침 반쯤 열어놓은 부엌 창으로 타닥타닥하는 빗소리가 들린다.

이 타이밍에 필요한 것은?

바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울려 퍼지는 음악과 따뜻한 차 한잔이다.

오늘의 선곡은 아침저녁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꼭 듣고 싶어 지는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일 년>




중, 고등학교 시절 내내 특별활동으로 방송부 생활을 했다.

청소년 드라마의 영향인지 방송부는 나름의 모집 절차를 통해 면접을 보고 선발이 되어야만 활동할 수 있는 인기있는 서클이었는데 그래서 방송부원이 되면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당연히 지원해서 방송부 활동을 했는데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공부에 방해될까 봐 이런 활동을 일부러 안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ㅋ

중, 고 둘 다 같은 천주교 재단의 여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청소년 드라마에서 나오는 방송부 선배와의 로맨스 이런 것은 아쉽게도 전혀 없었고 월간 조회, 전체 미사 같은 학교 행사를 준비하거나 점심시간에 나가는 점심 방송을 만드는 일이 주였다.

중학생 때는 16mm 비디오테이프에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는 뮤직 비디오를 녹화해서 나름 편집을 한 다음 점심시간에 자막(주로 공지사항)과 함께 틀어주는 방송을 만들었다. 당시 우리 집에서는 지상파 채널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방송을 만들기 위해 학교 방송실에서 보는 mnet, kmTV 같은 채널들이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하면 샤크라의 '한' 뮤직 비디오를 녹화하면서 방송실에서 친구들과 따라 부르던 장면이 떠오른다. (2000년에 발매된 앨범이네ㅋㅋ)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그래도 할 수 있는 방송의 수준이 조금 높아져서 거의 매일 점심 라디오 방송을 했는데 원고를 쓰고 음악을 선곡하고 친구들의 반응을 보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당시 나의 꿈은 라디오 PD가 되는 것이었다. 야간자습이 끝나는 밤 10시에는 시종이 울리지 않고 방송부원이 당번으로 음악을 틀어서 종료를 알렸는데 내가 당번일 때는 유행가요는 아니지만 친구들이 들으면 좋아할 것 같은 음악을 찾아서 틀곤 했다. 당시 틀었던 곡 중에 기억에 남는 곡은 로비 윌리엄스의 'Feel', 허밍 어반 스테레오의 '바나나 셰이크' 같은 곡들이다.

선곡을 핑계로 음악을 정~말 많이 들었던 시절이다.

유행하는 아이돌 음악도 많이 들었지만 공부한답시고 늦게까지 깨어있던 시절 듣던 심야 라디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당시 유희열의 <All That Music>이라는 밤 12시부터 1시까지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마지막 방송은 녹음해서 두고두고 들었을 정도로 애청자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제3세계 음악도 접하고 시부야 케이나 신스팝 같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시그널 음악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팬이었다.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만 해야 했던 고등학생 시절이라 이런 음악을 듣는 친구들은 주변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저 혼자 들으며 좋아했다. 당시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발달하지도 않았고, 있다 하더라도 거실에 놓여있는 컴퓨터를 밤늦게 사용하기란 불가했으므로 나의 팬심은 그저 음악 듣기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 들었던 음악들이 지금의 내 정서를 만드는데 정말 큰 몫을 한 것 같다.

 

어찌 된 일인지 대학생이 되고 나서 라디오 PD가 되겠다는 꿈은 그냥 허물어져 버렸다.

막상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되었을 때 그 직업은 더 이상 선택지에 있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직장인이 되고, 결혼을 해서 아이 엄마가 된 지금은 온전히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는 것조차 쉽지 않다. 가족과 함께하는 공간에서는 내가 듣고 싶은 음악보다 아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동요나 남편이 즐겨보는 다큐멘터리 소리가 채워져 있기 일쑤다.

그래서 오늘같이 오래간만에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혼자 보낼 수 있는 이런 시간에는 나는 꼭 음악을 찾는다. 신기하게도 요즘 좋아하는 음악이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음악에 푹 빠져 있었던 중고생 시절 듣던 옛날 음악이 떠오르고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진다.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이 글을 쓰는 동안 반복해서 틀어놓은 브라운 아이즈의 음악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가을날, 간절기 교복에 카디건을 걸치고 이어폰을 꽂고 걸어가는 중학교 3학년 시절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해 준다.

사춘기 시절 좋은 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고,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더 나이를 먹어도 그 시절 듣던 음악이 문득문득 떠오를 것이다.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에 추억이 가득 담긴 음악 듣기,

내 삶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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