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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Jun 09. 2024

몽롱했던 순간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5/6) 


https://blog.naver.com/pyowa/223472614697



소설의 끝을 향해가는데도 허튼 문장이 하나 없다. 서사가 비약되거나, 제3의 사건이나 인물로 초점을 흐리지 않는다. 이야기를 긴박하게 끌어나가면서도, 아련하고 평온한 묘사를 놓치는 법이 없다. 서른이 막 넘은 미시마 유기오의 솜씨는 정말이지 놀랍다.


피곤하지도 않은데 몽롱할 때가 있다. 주변과 내가 단절된 채, 귀는 웅웅거리고, 사물에 대한 초점이 조금은 흐릿하게 된다. 생각은 두서 없이 흐른다. 나와 내가 분리되어 내 모습이 보이는 듯 싶게 된다. 


촉촉한 바닥이 느껴지는 소나무그늘에 앉아 가지를 올려 본다. 나무뒤에 하늘, 구름, 눈을 시큰하게 하는 태양이 있다. 그늘엔 습하게 쌓인 솔잎사이로 개미들이 지나간다. 나뭇가지로 바닥을 헤치면 썩어가는 솔잎들이 끝없다. 헤쳐 들어갈수록 솔잎은 흙이 되고, 당황해하는 개미들이 보인다. 몽롱해진 나는 바닥까지 솔잎더미를 긁는다. 까맣게 변한 바닥이 긁힌다. 힘을 주어 긁으니 마침내 싱싱한 흙색이 보인다. 보통은 봄날의 오후였다.


비오는 날도 그렇다. 빗소리를 소리일텐데 얇은 막처럼 느껴진다. 빗소리는 여러 소리를 뿌옇게 만들어 소리로부터 나를 보호한다. 빗줄기는 사물을 틈틈이 가려 나를 차분하게 만든다. 처마에 떨어지는 빗방울, 바닥에서 튀어오르는 빗방울, 바람에 따라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가는 빗줄기를 보면서 나는 몽롱해졌다. 이리저리 모여 바닥에 고여지는, 마침내 모여 어디론가 흘러가는 얇은 물골을 보면서 생각은 갈피를 잃었다. 아무런 생각을 하다가도, 그 생각마저 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여름날 오후였다.


그것은 사실이라기 보다는 인식이었을 것 같다. 인식이라기보다는, 자연의 부분인 내가 자연속에 있었다는 사실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이제 곧 금각은 불 탈 것이다  



© evelinafrima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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