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축제로 시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희끗한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본관 VIP 회의실에 모여있었다. 그 사이에는 학생 대표 나연이 심사숙고한 표정으로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다. 교수, 교직원, 학생 대표로 구성되어 있는 대학평의원회 멤버들이었다. 그들 중 의장석에 앉은 구 교수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의 중앙집권적 통제는 이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 대학 분위기와 맞지 않아요. 오늘 안건은 대학 구성원 대표들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학교, 교수, 학생의 균형 있는 소통을 위해 총장 임명제가 아닌 총장 선거제 도입을 제안합니다."
평의원 중 한 명인 기획처장은 비아냥 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르지'
구 교수는 지체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자, 다른 의견이 없으면 이제 찬반 투표를 합시다."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위원들과 달리 심각한 표정의 교직원 노조 대표 조경민이 손을 들어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책을 읽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노조원들의 의견을 들어볼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축제 행사로 직원, 학생 모두 총장 선거제 도입에는 관심이 동 떨어져 있는데 이렇게 급하게 추진하는 게 맞을지 우려가 됩니다."
구 교수는 바로 맞 받아쳤다.
"내년 1월 이취임식을 고려하면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걸 다들 알지 않습니까. 올해도 성사 못 시키면 10년을 더 기다려야 되어요."
"그건 그렇지만.."
구 교수의 기에 눌려 교직원 노조 대표 경민은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이다. 구 교수의 리드가 계속되었다.
"자, 그러면 학생 대표 생각은 어떻습니까."
구 교수는 이번만큼은 자신 있었다. 투쟁 학생회를 견제하는 학생 대표에게는 선거 홍보 아이템이 될 것이고 총장 쪽 눈치를 보는 직원 대표도 말은 저렇게 해도 과도한 지시 문화에 지쳐 있었다. 교수 여섯, 교직원 셋, 학생 하나로 구성된 평의회에서 투표를 하게 되면 찬성이 이길 것이 분명했다.
"저는 물론 찬성입니다. 학생은 대학에 세 들어사는 세입자가 아니라 학교의 주인입니다. 물론 현 총장이 선거를 통해 연임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사립대라고 한 사람이 평생 총장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구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위원들의 반응을 살피더니 말했다.
"자, 그럼 투표를 시작하시지요."
구 교수의 지령에 어느 남자가 연노란색의 비닐장갑을 껸 채 투표함을 들고 왔다. 구 교수는 그가 자신과 공과대학장인 박 교수만 빼고 나머지 의원들에게 먼저 투표용지를 건네는 모습에 영 신경이 쓰였다. 그는 평의원회 집행일을 도와주는 총장의 아들이자 한영대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최연소 전임교수 윤지혁이었다.
지혁은 동생 아린 만큼 출중한 외모는 아니었으나 날카로운 눈매에 오뚝한 콧날, 턱이 약간 각진 갸름한 얼굴형으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181cm 키와 딱 벌어진 어깨는 네이비색 정장을 입힌 마네킹처럼 핏이 좋았다.
"박 교수님, 여기 용지 받으시죠."
지혁은 가장 앞에 착석해 있는 공과대학장 박 교수가 손을 내밀 때까지 투표용지를 주지 않고 들고 있었다. 지혁의 간사해 보이는 웃음에도 박 교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정우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오른손으로 투표용지 끝을 잡았다.
"당신 자리 유효기간도 곧 끝이네요. 양껏 발버둥 쳐 보세요."
지혁의 속삭이는 말에 흥분한 박 교수는 투표용지를 꽉 쥐고 자신의 몸 쪽으로 뺐어 왔다. 그 순간 손가락에 따끔하는 반응을 느껴 손을 펼쳐 보니 용지를 잡았던 부분이 붉게 달아 오른 모습이다. 지혁은 박 교수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행을 이어갔다.
"자, 한 장씩 모두 받으셨죠? 그럼 지금부터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렁차고 힘이 실린 지혁의 목소리는 구 교수를 살짝 움찔 하게 만들었다. 책상과 책상 사이가 먼 VIP 회의실이었기 때문에 서로 무엇을 쓰는지는 볼 수 없었다.
사각사각- 두 글자를 쓰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릴 정도로 적막이 흘렀다. 투표함이 곧 10장의 용지로 채워지기 직전이었다.
"으윽.. 억!"
갑자기 박 교수가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발작 증세처럼 입에서 거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연은 재빨리 박 교수가 앉은 앞자리로 가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박 교수님, 괜찮으세요!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으악!"
나연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박 교수 입에서 검은 거품이 품어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들 허둥대는 가운데 홀로 침착해 보이는 지혁이 휴대폰을 들고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응급구조대! VIP 회의실로 보내!"
짧고 간결한 한마디가 회의실에 울려 퍼질 때 준비한 듯한 구조대가 곧 문을 열어젖혔다. 익숙한 솜씨로 박 교수를 들것에 옮겨 문을 빠져나갔다.
지혁은 박 교수가 앉아 있던 책상 앞으로 걸어가더니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책상 위 투표용지를 높이 들었다.
"박 교수님은 다행스럽게도 투표를 하고 가셨네요. 몸이 아픈 사람도 끝까지 한 표를 행사한 이 투표, 멈출 수는 없겠죠. 구 교수님, 어떻게 할까요? 계속 진행할까요?"
구 교수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에서 떨고 있는 게 모두에게 전달될까 두려웠다.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조금 진정되었는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모두 숨을 죽이고 지혁의 손 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교직원 대표와 학생 대표는 정우의 오른쪽에 앉아서 정우가 개표하는 용지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검증 역할을 맡았다.
지혁의 개표가 시작되었다.
"바로 개표하겠습니다. 찬성... 반대...
...
마지막 표는.. 반대입니다."
그 순간 잠시 적막이 흘렀고, 구 교수는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지혁은 사무적인 태도로 자세를 가다듬고 공표하듯이 말했다.
"찬성 둘, 반대 여덟로 총장 선거제 도입 안건이 부결되었습니다!"
곁에서 일어나 있던 학생 대표 나연이 한숨을 쉬고, 내키지는 않지만 억지로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쥐고 있는 주먹을 억지로 펴는 건 주먹의 주인, 펴는 사람 모두 힘든 법입니다. 우리 물이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함께 흘러가보는 게 어떨까요."
구 교수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은 작은 목소리로 동의를 제창했다.
구교수는 미간이 찌푸려지고 근심이 담긴 표정으로 답했다.
"평의회 의장 다음 자리는 총장 밖에 없지요. 제가 그 자리를 욕심내는 것은 야망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성장 욕구였습니다. 주먹을 펴야 악수도 하는 법이지요. 투표는 공정하게 진행되었으니 결과 또한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것으로 금일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땅땅- 소리가 VIP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같은 건물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집무실에는 조명이 모두 꺼진 채 수십 개의 모니터가 켜져 있었다. 이를 통해 투표 과정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깜박이는 모니터 빛을 응시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윤승호였다. 그는 화면을 바라보며 마이크 버튼을 켜고 마이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총장 윤승호입니다. 규정대로 다음 총장은 제가 임명합니다. 저는 연임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나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저를 임명하지 않겠습니다."
VIP 회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치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의 사람들의 반응을 살핀다. 눈빛이 빛나며 스피커 쪽을 쳐다보는 윤지혁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총장 윤승호가 다음 발언을 이어 한다.
"한영대의 새로운 총장은 한영대의 대학생, 대학원생, 교수, 교직원 대상으로 공개 모집 선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