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본관 앞 두 마리의 호랑이 석상 눈이 깊은 새벽 밤 속에서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본관 안에서 보고 들은 내용은 절대 발설하지 않기'로 각서와 지장을 찍고서야 새벽 두 시가 되어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택 무단침입과 폭행에 대한 고소를당하지 않기 위해 해야만 하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성진이 합리적인 의심을 하겠다는표정으로 눈을 살짝 흘기며 준아에게 물었다.
"근데.. 둘이 벌써 사귀는 건가요?"
"에? 아니에요. 그냥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요. 뭘, 사귀다니요! 친구가 된 거죠."
"사실.. 아까 낮에 타로 볼 때 구경했거든요. 후배들이 예쁜 여자 있다고 자꾸 가자고 졸라서 갔다가.. 다시 학과 주점에 가봐야 해서 끝까지 있었던 건 아니고요."
"아, 그때 그 자리에 왔었군요."
"네, 그리고 밤에 주점 심부름 좀 하느라 광장에 나왔다가 둘이 같이 있길래 알아봤는데 뭔가 상황이 자꾸 이상해보여서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만, 껴들게 되었네요. 제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미라.."
"아.. 그랬군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이것도 인연인데 괜찮으면 한 잔 할래요? 도와준 것도 보답할 겸 제가 한 잔 살게요. 오늘 같은 날은 기숙사에 들어가도 잠이 안 올 것 같아서요."
"한잔- 좋죠! 근데 주점들이 다 문 닫았겠죠. 정문 앞 번화가에 제 단골 집이 하나 있는데.. 굼터라고요."
"굼터?"
준아는 굼터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래서인지 괜히 정감이 가는 기분이라 선뜻 응했다. 굼터는 생선구이가 메인 메뉴인 작은 포장마차였다.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는 마치 학과 주점을 연상하게 했다. 두 사람은 고등어구이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형님, 저 보다 나이도 많고 선배인데 말 편하게 하세요. 그게 저도 편해요. 둘 다 복학생인데 편한 게 좋잖아요."
성진이 먼저 준아에게 말을 놓을 것을 권했다. 준아는 못 이기는 척 말을 놓았다.
"그래.. 그럼.. 너도 나한테 말 편하게 해. 근데 여기 분위기 참 좋다. 난 포장마차 같은 스타일이 좋더라. 축제 시즌에 학과 주점이랑 닮았고.. 뭔가 프랜차이즈처럼 형식에 갇혀 있는 느낌도 안 들고.. 자유롭잖아."
"맞아요! 저도 이런 스타일이 편하더라고요. 여기 이모님 생선구이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고등어구이 하나면 소주 세네 병은 금방이에요. 이래서 제 단골집이랍니다."
성진은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준아는 소주 한 잔이 달게 느껴졌다. 소주보다 쓴 일이 너무 많은 날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 '윤아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상하게 술이 한 잔 들어갈수록 더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러다 회상을 가로막는 얼굴이 떠올랐다. 윤지혁. 그 생기 없는 차가운 표정이 생각나자 고개를 두 번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주점 심부름했다는 건 머야. 혹시 학생회활동하는건가?"
"예, 집행부 좀 도와주고 있어요. 일찍 복학했더니 동기들 다 군대 가 있어서 심심한 찰나에 잘 되었죠."
"아! 반갑네. 나도 과대하고 있거든."
"아, 그래요? 우린 오늘 아니더라도 언젠간 보게 될 사이였네요. IT대학이랑 법학대학 건물도 가까운 편이 잖아요."
"그러게, 오늘 보기를 잘했다. 나 혼자서는 아마 그들을 못 당했을 거야. 정말 고맙다!"
"에이.. 고맙긴요. 뭘.."
둘은 서로의 잔을 반갑게 부딪혔다. 둘 다 팔 홉이 가득 찬 소주잔을 한숨에 비웠다.
"그러면 법대 다니니까.. 나중에 사시 생각하고 있니~?"
"뭐, 그렇죠. 다들 보니까요. 형은 IT 쪽이니까 취직 잘 되겠어요~"
"아.. 그렇다고 하더라고. 근데 난 좀 길이 달라."
"엥? 전공이랑 다른 생각하시는 거예요?"
"응.. 그렇지. 내 꿈은 말이야. 국정원이야."
취기가 올라온 준아가 솔직한 얘기를 털어놓자, 성진의 얼굴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준비하고 있거든. 아버지한테 영향을 받아서 '정직'하게 살기로 결심한 뒤로 내 좌우명은 두 개야. '바른 길에 서자랑 약자 편에 서자."
"오- 멋진데요~ 근데 왜 국정원이에요? 거기가 바르고 약자 편에 서는데 인가?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것 같은데."
준아는 비꼬는 성진의 태도에 그럴 수 있다는 표정으로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가장 바르지 않고, 가장 약자 편에 서기 힘든 곳이 어딘가 찾아봤지. 그게 국정원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거기에 가서, 가장 안 되는 곳에 가서 그것을 바꿔 보려고. 그렇게 만들어 보려고."
성진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듯이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잔 하시죠. 국정원.. 아니 꿈을 위하여. 하하"
"잠깐..
근데 말이야, 오늘 비슷한 곳을 가본 것 같아서.. 바르지 않고 약자 편에 서지 않는 곳."
"..."
"성진아, 거기.. 우리 오늘 들어갔던 곳.. 한번 제대로 밝혀 보려는데.. 나 좀 도와줄래?"
"... 감당할 수 있겠어요? 오늘 본 건 빙산에 일각이에요. 요~만큼 일각. 이 형 진짜 위험하네!"
"하하.. 내가 말이야..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
"엥? 뭐여.. 혹시 타로? 하하하. 이 형 많이 취했네."
"그래! 타로! 내가 타로 점술가다! 하하!"
소주병은 어느덧 네 병이 비어 있었고 다섯 병 째 술이 조금 남아 있을 때쯤 밤하늘은 자취를 감추고 다음 날이 새고 있었다.
드르르륵- 굼터의 셔터가 내려갔다. 성진은 취한 준아를 부축해서 준아가 사는 기숙사까지 함께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