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많아지고 있다. 청년단체는 물론이고 각종 위원회도 생겨나고 있다. 출마를 염두하고 있거나 선언하는 청년도 많아지고 있다. 선거시즌에만 나타나던 ‘청년’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으니 좋은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청년팔이’가 드디어 끝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두 가지 측면에서 갸우뚱하게 된다. 하나는 늘 이야기하던 기존 정치권력에 비해 ‘청년’의 참여권, 발언권, 결정권 등이 부족한 점이다. 지역을 막론하고 행사의 좋은 그림을 위해 병풍이 됐던 일은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이는 형식은 갖춰지고 있지만 형식만 갖춰지고 있기에 생겨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청년 스스로가 자기도 모르게 ‘청년팔이’를 한다는 점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 조심스럽지만, 과거 ‘청년정당’ 활동부터 지금까지 모호하고 때로는 공허하게 느껴지는 점이다.
청년이 청년을 대변하겠다. 청년 스스로가 청년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청년의 문제는 이제 청년이 해결하겠다. 많은 곳에서 ‘청년팔이’를 끝장내겠다며 내세워지는 말들이다. 조금씩 변형을 거쳐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서 ‘청년’은 어떤 청년인지 이제는 묻고 답을 해야 할 때다.
청년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청년은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왜 다양성일까. 청년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별, 지역, 나이, 학력, 직업, 소득 등 청년의 범주 안에서도 청년은 세세하게 나눠진다. 나 역시 ‘청년’이나 이 범주 안에서도 세세하게 나눠지는 범주에 속할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MBTI로도 나눠질 것이다.
예를 들어 시민단체 활동가인 나는 대구에서 태어나 군복무 시절을 제외하고 쭉 대구에서 살았다. 현재 서른 살이며 대학은 자퇴했고 소득수준이 높지 않은 가구에서 태어나 지금도 소득수준이 높지 않다. 이런 내가 전체 청년을 대변하겠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마찬가지로 소득수준이 높고 학력이 높으며 큰 기업에 다니고 있는 청년이 청년을 대변하겠다고 하면 역시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결국 자신과 비슷한 범주에 있는 청년들만 대변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받을 게 뻔하다.
앞서 이야기했듯 청년은 다양하며 청년문제 역시 다양하다. 청년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눠도 주장하는 게 달라 갈등이 생긴다. 즉, ‘청년’이라도 각자 대의하고 싶은 게 다르며 바라보는 해결방법 역시 달라진다. 서로가 생각이 다르고 처한 문제가 다른데 거창하게 ‘청년’ 전체를 대표한다는 말이 공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나도 마찬가지고 우리 모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감히 이야기하자면 청년활동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청년’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 중 누구를 대변할 것인지 말이다. 정치라는 게 그렇고 사회활동이라는 것은 결국 모두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어떤 범주의 누군가를 대변하는 게 아닌가. 이건 나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사회에는 각종 시민단체와 정당이 많은데 왜 ‘청년’은 ‘청년’ 하나여만 하는가. ‘청년’을 뭉뚱그려 사용하는 건 청년팔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청년’이 대두되고 있는 만큼, 청년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환경이 필요하다. 각자를 대변하는 ‘청년’들이 많아진다면 자연스럽게 거버넌스 구축과 정치환경의 변화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험난하고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겠지만, 그게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험난했고 또 앞으로도 여전히 험난하겠지만 청년활동의 영역이 잘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