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전부 합친 것보다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그런 내가 이제까지 주로 관심을 가진 부분은
나의 마음, 생각, 태도 등 주로 정신적인 요소였다.
상대방의 어떤 태도나 말에 기분이 상할 때
그것이 나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인지 자문해 보고,
누군가에 대해서 좋다고 느끼거나 싫다고 느낄 때
내가 타인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점검해 본다.
과거 어떤 상황에서 내가 '왜' 당황하고 버벅거렸는지,
어떤 사건은 '왜' 특히 더 마음이 쓰이고,
다른 어떤 사건은 '왜' 꼴도 보기 싫은지
등등 내 마음과 상태의 원인을 되짚어보곤 한다.
"타인에게는 거짓말을 하더라도 스스로를 속이지는 말자"
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나 자신을 분석하며 자아를 형성해 왔다.
이렇게 나 자신을 잘 살펴보는 나조차도
최근까지 놓치고 있던 부분이 있었다.
이제까지는 내 상태의 원인을 파악할 때
생각과 마음을 주요 요소로 분석해 왔는데,
몸(신체적 요소)이 원인인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내 몸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내 몸은 내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당연한가?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실체적으로 깨달았다.
그동안은 정신적인 영역에 너무 가중치를 두었고,
내 몸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
최근 내가 알게 된 내 몸의 영향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더위는 잘 견디지만 습도에 매우 취약하다.
기온이 높을 때는 에어컨이 없어도 선풍기를 틀거나
마주난 창문으로 바람이 통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습도가 70%를 넘어가면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지고 무기력해지며
불쾌지수가 치솟아서 만사 귀찮고 짜증이 솟는다.
나보다 더위를 훨씬 많이 타는 남편이 괜찮다는 온도에
나 혼자 더워서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던 어느 여름밤에
습도계를 확인하고 나서 실증적으로 깨닫게 된 사실이다.
나는 비 오기 직전 찌푸린 날씨에 몸 상태가 아주 안 좋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아프고,
목어깨가 저리고 온몸이 뻐근하고 자꾸 눕고 싶다.
처음에는 내가 일을 하기 싫어서 몸이 아픈가 했다.
이렇게 아프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곧바로 멀쩡해지는 경험을 두세 번 반복하니 알게 되었다.
"아이고 비가 오려나~~" 하며 허리를 두드리는 할머니처럼
이런 날은 어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며
어쩔 수 없이 잠시 숨을 돌리고 쉬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호르몬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어느 날 이상하게 아무런 이유 없이 잠이 너무 안 온다면?
밤늦게 커피를 마신 것도 아니고,
늦게까지 핸드폰을 보거나 티브이를 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잠이 안 오고 눈이 말똥말똥해서
다이어리를 확인해 보니.. 배란일 밤이었다.
배란일이니 잠들지 말고 깨어 있는 상태로 활동하며
짝을 찾으라는 호르몬의 명령으로 잠이 오지 않다니
살짝 소름이 끼치며 무서워졌다.
나의 마음은 내일을 위해 푹 자고 싶다는 의지를 내뿜었지만, 몸(호르몬)의 영향력은 내 마음과 이성을 압도했다.
(다만 극도의 피로와 피곤은 배란일의 호르몬을 이긴다.)
그리고 생리 시작 며칠 전부터
극심한 무기력증과 의욕 저하에 시달린다.
마치 지킬과 하이드 같다.
내가 스스로 결심한 내 삶을 빛나게 할 소소한 다짐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지고, 별 것 아닌 것에도 화가 난다.
주중에는 외식을 자제하고 간소한 집밥을 먹자는 다짐은
'요리하고 치우기 귀찮으니 나가서 아무 거나 먹자'는 만족스럽지 않은 외식으로 대체된다.
이런 류의 외식은 돈을 쓰고도 만족을 얻지 못하는
무의미한 최악의 소비라고 생각하는데도 그렇게 된다.
아이들에게 짜증 내지 말고 차분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연습을 시키려고 노력하던 내가 마녀로 돌변해서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내지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고 자책한다.
나는 내가 스스로 한 결심을 고작 한 달도 지키지 못하는
부족하고 어처구니없는 인간인가 자책하기를 수십 번인데,
내 몸의 상태를 찬찬히 살펴보니 그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이전부터 생리통이 심한 편이라
생리 시작일부터 이틀 정도 지속되는 생리통 때문에
아프고 힘들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생리 며칠 전부터의 무기력증과 의욕저하가
내게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비교적 성실한 편이라고 자부해 왔는데도,
이제까지 숱하게 많은 운동과 취미, 배움을
지속하지 못하고 왜 자꾸 중간에 그만두었는지도
비로소 의문이 조금 풀렸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수영, 피아노, 영어, 테니스 등도
이 기간이 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는 생각만으로도 귀찮고
이런 걸 뭐 하러 시작했을까, 모두 부질없다는 마음이 든다.
그런데 이 기간만 며칠 지나가면 그런 마음은 사그라들고
제대로 살아보자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진짜 지킬 앤 하이드가 따로 없다.
그런데 이 때는 이미 꾸준함의 사슬이 끊어진 뒤라
나는 꾸준히 하지 못하는 불성실한 인간이라 자조하면서
끊어진 사슬을 이어가지 못하고
진짜로 그만둬 버리곤 했던 것이다.
하이드가 이기는 기간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 요즘은 자책하는 대신 다른 전략으로 임하고 있다.
우선 내 몸과 싸워 이기려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는다.
의지력, 정신력, 투지 등은 웬만하면 몸에게 진다.
아이들에게는 내가 마녀로 변신하기 전에 미리 경고를 한다.
오늘 엄마가 몸이 좋지 않고 힘들어서 화를 낼 것 같으니
나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고 잠시 눕는다.
이제 제법 아이들이 커서 내 말을 알아듣고 자제한다.
집밥 먹기 다짐을 이어갈 수 있도록
양념고기나 밀키트를 미리 주문해 놓고 활용한다.
운동이나 영어공부는 '잘하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일단 가기만(켜기만) 하자'는 말로 나를 다독인다.
이런 상태에서 가기만 한 것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혹시 가지 못해 한 번 쉬더라도 이걸로 끝이 아니라고,
오늘 하루 잠시 쉬었어도 며칠 후에 다시 이어가면 된다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독려한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질책하는 것보다
내 몸의 영향과 한계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이
꾸준함을 이어가는 데 있어서 훨씬 효과가 좋다.
자꾸 작심삼일로 그치는 다짐들 때문에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후회와 자책하는 기분이 자주 든다면,
자신의 부족한 의지력과 정신력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몸 상태와 그 원인을 천천히 살펴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