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여행 직전에 '살림지옥 해방일지'라는 책을 읽었다. 작가는 일본 아사히신문사를 50대에 퇴사하고
혼자서 간소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일본인 여성.
문체가 유쾌하고 주장이 명쾌해서 재미있게 읽었다.
인상 깊은 구절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간소화만이 게으른 사람을 풍요로운 생활로 인도'한다는 부분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경포호수를 걸으면서, 간소화 = 소유물 줄이기 = 풍요?로
연결되는 이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통상은 소유한 것이 많을수록 더 풍요로울 것 같고,
집안일에 들어가는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는 편리한 물건이 많이 있을수록 집안일 대신 여가에 쓸 시간이 늘어날 것 같지만, 실제 경험상 꼭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모든 소유는 필연적으로 관리를 동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좋아하는 레고에는 늘 먼지가 쌓이고,
내가 좋아하는 책은 햇빛에 변색되거나 종이가 삭는다.
청소도구인 진공청소기도 분해해서 청소해주어야 하고,
여름 내 열일한 에어컨은 필터를 갈고 청소를 해줘야 한다.
옷은 섬유 소재에 따라 빨래를 하거나 드라이를 맡기고,
식기는 쓸 때마다 설거지를 해서 다시 제자리에 둬야 하고
설거지가 귀찮아서 배달음식을 시키면 배달용기나 포장을 씻어서 분리배출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라온다.
이처럼 소유한 물건이 많아질수록 관리할 것들이 늘어나고,
당장의 시간과 노력을 단축시켜 준다는 물건을 관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또 투입되니, 그런 편리한 물건이 늘어나도 정작여가 시간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는다.
게다가 나는 게으르고, 게으르고 싶어 한다.
게으름 피우며 뒹굴뒹굴 여유 부리는 것이 좋다.
여유 부리며 느긋하게 사는 것이 삶의 목표다.
이런 나는 소유물을 제때 제대로 관리하는 게 버겁다.
그리고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물건을 집에서 마주할 때마다
'아 저거 조만간 청소해줘야 하는데' 등의 의무감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자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일부러 못 본 척 흐린 눈을 해도, 다른 가족들은 잘 몰라도,
내가 관리하는 물건의 상태를 나는 알고 있으니까,
관리상태가 애매한 물건을 보며 마음이 켕기는 것이다.
책의<간소화가 게으른 사람을 풍요로움으로 인도한다>는 내용은 내게 이런 이유로 다가왔다.
그래서 경포호수를 걸으며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켕기는 물건' 특히 가전제품을 조금 더 비우기로 결심했다.
결심 1 : 캡슐커피 머신을 비우자!
나와 남편은 커피를 참 좋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커피를 만들어 먹는다. 분쇄원두를 사서 드립커피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홀빈을 사서 분쇄까지 할 때도 있다. 이번 여름에는 콜드브루 원액과 오트밀 우유를 사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라테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커피믹스도 가끔 먹는다.
이렇게 되니 캡슐커피를 마시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사실, 캡슐커피를 선물받은 이후로 커피가 추출되는 노즐 청소를 제대로 해준 적이 없었다. 물통이나 분해되는 부품은 자주 물로 씻어주는데, 노즐은 기계 속이라 어떻게 청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커피를 추출하기 위한 캡슐을 사서 보충해 놓는 것이 점점 짐스러운 의무로 느껴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맛과 가격대의 캡슐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매번 골라서 구매하는 것이 점점 귀찮아졌다. 그리고 커피 추출 후 나오는 캡슐 쓰레기를 모아서 버릴 때 그 부피가 꽤 커서 죄책감이 든다. 아마 그래서 점점 더 캡슐을 사고 싶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캡슐을 모아서 수거해 가는 서비스도 있다고 들었는데, 알아보기 귀찮기도 하고(게으른 사람) 일정량이 되도록 캡슐 쓰레기를 모아놓는 게 싫기도 해서 이용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점점 부담으로 자리 잡고 있는 캡슐커피 머신을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분리되는 부품과 머신 외부를 깨끗하게 씻고 닦은후 당근마켓에 판매글을 올렸다. 노즐청소가 안되어 있다는 점도 함께 기재했다. 판매가 대비 저렴하게 글을 올렸더니 금방 팔렸다. 부엌 싱크대 상판에 자리 잡고 있던 큰 물건이 없어지니, 공간에도 여유와 여백이 생겼다. 캡슐커피 머신을 비운 뒤로도 매일 하루 2잔의 커피를 맛있게 만들어먹고 있다. 후련하고 홀가분한 기분이 크고, 아쉬운 마음은 없다.
결심 2 : 에어프라이어를 비우자!
에어프라이어는 11년 전 결혼할 때 선물받았다.
오래 되었는데도 고장 한 번 안 났고 멀쩡하게 작동한다.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가끔 냉동 만두나 치킨을 조리할 때 유용하게 쓰고 있어서 비울까 말까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소유물을 줄여 관리의 부담을 덜자는 결심 후에
에어프라이어를 생각하게 된 이유는, 에어프라이어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으른 사람)
식재료를 넣는 바구니 부분은 조리할 때마다 세척하지만,
그물망 사이사이에 낀 기름기를 100% 제거할 수는 없어서
찌든 기름기로 인해 노랗게 변색된 부분들이 있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신경이 쓰여서 칫솔로도 닦아보고 바구니와 철망을 분리해서 닦아보기도 했는데, 100%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심각한 곳은 음식이 닿지 않는 상단의 코일 부분.
에어프라이어 안에서 음식이 조리될 때 기름이 튀고 열기가 올라가는 부분인데, 분해되지 않는 안쪽 부분이라 어떻게 청소할 도리가 없어서 모른 척 흐린 눈을 하고 있었다. 재료가 닿는 부분은 아니니까.. 애써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세척을 시도해 봐야겠다는 마음의 부담이 있어서
인스타그램에서 에어프라이어 상단 세척 팁 같은 게 나오면 '이렇게라도 해볼까' 싶어서 저장을 하곤 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늘 끊임없이 있기 때문에 에어프라이어 상단 코일 세척까지 순서가 돌아가지 못했다.
또 에어프라이어를 사용하는 음식은 주로 냉동 튀김류이다.
조리법이 간단하고 결과물은 참 맛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런 요리를 자주 안 해 먹게 되었다.
종종 물만두를 에어프라이어에 튀겨 먹었는데, 요즘은 그냥 물에 데쳐서 먹는다.
에어프라이어를 감자나 고구마 굽기에 이용하기도 했는데, 올해는 그냥 냄비에 채반을 올려서 쪄먹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니,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11년이나 된 물건이라 판매나 나눔은 어려울 것 같아서
분리수거장에 소형가전 폐기물로 내놓았다.
기존에 에어프라이어를 이용하던 요리들은 조리법에 따라 프라이팬, 전자레인지, 찜기(채반)를 이용하면 되니까 크게 아쉬움이 없다. 대신 에어프라이어를 넣어두던 싱크대 하부장에 여유 공간이 크게 생겼고, 에어프라이어를 볼 때 생기던 켕기는 마음이 사라져서 후련한 기분이다.
이번에 비운 큰 물건들
전자제품 두 개를 비우면서, 앞으로는 되도록 새로운 종류의 전자제품을 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런 결심만으로 온갖 편리하고 신기해 보이는 전자제품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기분이다. 편리하다는 제품들의 기능이나 스펙, 브랜드별 차이점과 가격 등을 검색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겠다는다짐만으로도여가시간이 좀 더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다.
소유에는 반드시 관리가 동반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앞으로는 관리까지도 기꺼이 즐겁게 감수할 수 있을 만큼만 소유하고 싶다.
예를 들어 드립커피를내려마실 때 필요한 드리퍼와 서버.
커피를 내려서 머그컵에 따르자마자, 아직 드리퍼와 서버가 따뜻할 때 재빨리 물로 씻어서 바짝 말린다. 잘 마르면 항상 정해진 장소에 보관한다. 커피를 내리고 남은 커피 찌꺼기로는 프라이팬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낼 때 쓴다.
간단한 방식으로 그때그때 관리하니, 커피 도구를 볼 때 켕기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 현재 기쁘게 소유하고 있고, 앞으로도 오래 소유할 물건 중 하나다.
설거지를 싫어하는 내게는 식기세척기도 기쁘게 소유하는 물건 중 하나다.식기를 넣기 전에 깨끗하게 초벌해서 넣기 때문에 음식찌꺼기가 기계에 남지 않아 관리할 게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