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한진 Nov 29. 2021

거미가 되어 걸어가셨다

  어머니가 또 요양원으로 가겠다고 하셨다. 이번에는 강경하셨다. 

  치매가 있으신 어머니는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돌아오신다. 점점 그 빈도가 잦고 길어져 걱정이다. 게다가 요즘 농장 추수철이라 일손이 부족해서 보살펴드리는 사람이 곁을 비울 때가 많았다.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어머니는 거동이 힘들 것 같으면 당신 발로 요양원에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자식들에게 짐 되지 않겠다, 요양원에 가면 말동무도 있고 도와줄 사람도 있다고 하시지만 자식으로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설득하고 실랑이를 했으나 요지부동이다.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모두에게 알렸다.

  입원을 이틀 앞둔 저녁, 송별 파티 겸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자식들 내외와 손자, 증손자까지 20명이 넘게 모였다. 내가 어머니 곁에서 아무 일 없는 척 밝게 말을 거는 동안 누나와 여동생은 자꾸만 훌쩍거렸다. 그나마 초등학교 저학년인 증손자 녀석이 어머니에게 안겨 귀염을 보여주어 잠시 잔잔하게 웃으셨다.


  코로나로 요양원 입원도 까다로워졌다. 필요한 검사와 서류가 스무 가지가 넘었다. 꼬박 이틀 넘게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과 관공서를 돌아다녀야 했다. 입원서류와 생활품 가방을 들고 요양원에 도착한 우리는 당분간 면회할 수 없다는 설명까지 들은 다음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했다.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어머니의 눈에 옅은 안개가 흘렀다. 

  “나는 괜찮다. 이제 가거라.”

  복지사의 팔에 의지한 어머니가 주춤주춤 문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건물을 나와 차에 앉는 순간 누나가 ‘고려장’이라면서 쓰러져 흐느끼기 시작했다. 모두 앙다문 어금니 사이로 울음을 삼켰다. 부모 하나 모시지 못하는 이 현실이 과연 잘살게 된 삶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12월 중순 영하에 가까운 날씨, 싸락눈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 주인이 떠난 어머니 방에는 벌써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집에 있을 수 없었다. 버스를 탔다. 그리고 이끌린 듯 오랜 기억을 더듬어 걸었다.     

  1969년 1월 초, 손수레에 낡은 가구와 이불 조각 몇 개를 실은 어머니는 나와 여동생을 데리고 동문 로터리 동양극장 앞의 비탈길을 걸어 올랐다. 너무나 높았다. 어스름 속 괴물 같은 검은 건물이 8살 꼬마의 머리를 눌렀다. 반쯤 녹은 싸락눈이 진눈깨비가 되어 휘돌아 후려쳤다. 

  똑똑하고 배운 것이 많으나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고 술에 빠져 지내던 아버지가 어느 날 재산 모두를 팔아 사라지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심지어 할아버지와 삼촌네 재산까지도 손을 댄 바람에 엄청난 원망과 구박이 어머니에게 쏟아졌고. 한겨울 그 새벽길은 어머니의 벼랑 끝 선택이었다.


  불기 없는 마루방에서 한 이틀 진눈깨비를 피한 어머니는 빨간 고무 함지박을 들고 이웃 아주머니를 따라 산지 부두로 갔다. 그리고 억센 사람들 틈에 끼어 부대끼면서도 용케 고등어 한 함지박을 사더니 머리에 이고 동문시장으로 달음질쳤다. 당시 2학년인 나보다 손바닥 하나 정도 클 뿐이었던 어머니가 함지박에 눌려 더 작아질 것만 같았다. 

  시장에 어머니의 좌판은 없었다. 입구 밖 길가에도 이미 자리 잡은 사람들이 있었다. 끼어들려면 밀쳐내고 심지어 함지박을 통째로 뒤집어버리기도 했다. 허겁지겁 고등어를 주워 담는 어머니가 불쌍했던 것일까. 어떤 분이 곁을 내어주어서 귀퉁이에 겨우 발을 비집고 섰다. 그리고 고등어 사라는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마른 솔가지 같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외침에 가려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 생선 사러 오는 발길이 뜸해졌다. 그러면 어머니는 남은 것을 머리에 이고 시내 골목을 더듬었다. “고등어 사세요.” 끝내 남은 몇 마리는 어머니의 체취에 스며들었고, 얼굴은 고등어의 푸른색으로 물들어갔다. 돌아와 쓰러진 어머니의 종아리를 주무르노라면 막대기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냄새난다며 코를 잡을 짝꿍 여자아이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고등어를 좋아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삼 년 정도 뛰어다닌 어머니는 어느 건천 기슭 무허가 블록집을 샀다. 수도가 없어서 물을 길어 오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피를 켜야 했으나 그곳에서의 십여 년은 참 따뜻했다.


  어느 날, 시청의 서류가 하나 배달되었다. 저녁에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여러 번째 온 계고장이라며 웅성거렸다. 며칠 후, 건장한 남자들이 동네로 들어섰다. 망치를 휘두르려는 그들 앞에 동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드러누웠고, 일하러 나가지 않은 어머니도 뛰어나가 멱살을 잡으려고 덤벼들었다. 눈에 푸른빛이 돌았고 입에는 허연 거품도 보였다. 그들은 두어 시간 실랑이하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그들이 저만치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기절하듯 풀썩 주저앉았다. 

  방송은 가끔 불현듯 나의 기억을 일깨워 소환한다. 오래전의 철거민 뉴스, 일가족 사망 뉴스가 그랬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사업 실패와 비관 때문에, 가정 폭력이 계속되다가,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는 잘못된 의식이…. 그때마다 진눈깨비 속의 언덕길과 고등어 함지박을 이고 달음질하던 어머니, 어두울 무렵 여동생과 함께 문밖을 내다보다가 바스락 소리에 놀라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 뉴스 속 아이들은 50년 전의 내 모습이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어머니 말고 또 다른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 뒤돌아보면 그 겨울 새벽길을 걸어 오른 이후 지금까지 내가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도리어 삶의 고비 고비마다 어머니에게 의지하고 하소연했는데, 어머니에게는 요술 주머니라도 있는 것인지 온갖 도움을 주셨다. 어미의 몸을 파먹고 자라는 새끼 거미와 내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내가 어머니를 위해 흘린 눈물보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흘린 눈물이 열 배는 넘을 것’이라던 어느 분의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53년 전 그 새벽에 걸어 올랐던 비탈길 앞에 섰다. 까마득히 높을 것 같았던 길은 백 걸음 남짓한 언덕길이다. 10여 분쯤 더 걸었다. 도라지와 안성호가 떠나던 산지 부두는 페리호와 유람선이 정박하는 항구로 커져 있다. 어머니가 섰던 자리를 찾았다. 모든 것이 달라졌으나 비릿한 생선 냄새는 예전 그대다. 이쯤에서 고등어를 샀을 것이다. 맨손으로 고등어를 집어서 함지박에 넣고 휘청거리며 달음질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바다를 향해 섰다. 가슴을 헤집은 바람이 검푸른 바다에 싸락눈을 뿌린다. 저녁 어둠이 서서히 내려온다.     


  오늘, 새끼들에게 모두 먹여 껍질만 남은 어머니가 걸어가셨다.



                                                                                                                                             <2021. 12. 21.>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 저녁, 말을 버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