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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Dec 01. 2021

누구의 책임인가

   TV에서 인기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놀랍다. 기성세대의 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디어와 실력이 나를 매료시킨다. 흉성과 두성, 진성과 가성을 마음껏 넘나드는 발성과 성량, 호흡, 감정표현, 극적인 연출과 퍼포먼스가 나를 쥐어흔든다.

   이어지는 출연자들이 더 큰 감동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 퍼포먼스도 함께 격렬해진다. 심사위원과 방청객들이 ‘소오름~’ 하며 칭찬하고, 무대는 그 작용과 반작용이 엉키며 더 뜨거워진다. 화면이 터질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흥미진진함과 놀람, 감탄을 연발하면서도 무언가 조금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커진다. 경탄스러움이 조금씩 부담스러움으로 바뀌고, 나는 놀라면서 조금씩 지쳐간다. 탈락하여 무대를 내려간 앞 참가자들의 얼굴과 음악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은 어쩌면 그런 기억 따위는 할 필요 없다고 하는 것 같다. 이겨서 단계를 계속 올라가는 승자만 기억하고 감탄과 찬사를 모아주길 원한다. 이런 무대와 시청률의 공식을 잘 아는 기획자가 영악하게도 프로그램에 베틀이라는 프레임을 겹쳐놓았기 때문이다. 무대 위의 절규가 전투를 벌이고 있다.

   저 젊은이들은 모두 챔피언이 될 수 있다고 격려하며 키운 세대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인생의 출발점에서 한 명의 스타를 수만 명의 연습생이, 한 명의 성공자를 수백만의 루저가 받치고 있는 경쟁시스템을 만나고 있다. 힘을 다해 눈앞의 경쟁자를 이겨야 다음 단계로 올라서며, 패배자는 내려와 사라지는 것이 규칙이다. 발버둥 치는 그들의 퍼포먼스가 서늘하기만 하다.     


   밤새 비가 왔다. 평소 산책길 여러 곳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겼을 것이다. 오늘은 시내 공원으로 가야겠다. 2킬로미터 남짓한 저수지가 있는 그곳은 항상 붐빈다. 산과 물과 나무가 어울려 뿜어내는 공기를 마시면 생기가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공원은 도시인의 폐라는 말이 느껴진다.

   그런데 주차가 불편하다. 주차장은 공원 안쪽 깊은 곳에 있다. 차선 하나는 이미 빽빽한 주차장이 되어 있고, 움직이는 차들은 입구 전부터 앞뒤로 꼬리를 문 채 느릿느릿 빈 곳 찾느라 여념이 없는 듯하다.

   주차장 표지판이 보였다. 빈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냥 지나쳤다. 어느새 두 바퀴째, 주차장 표시가 다시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한번 들어가 보자 하며 들어섰다. 역시 차들이 촘촘했다. 조금 더 들어갔다. 웬걸, 빈자리가 여럿 보였다. 얼른 주차하고 걸어 나왔다.

  꼬리를 물고 차들이 흐른다. 주차장으로 들어올 생각은 전혀 안 하며 언제 날지 모를 틈새를 찾느라 집중하고 있다. 웃음이 나오다가 멈칫했다. 몇 분 전까지 ‘거길 왜 들어가, 헛일인데’ 생각하며 갓길만 살피던 내가 지금은 어리석다고 그들을 비웃는 상황. 잠깐 사이의 이 반전이 생소하면서도 우스웠다.

   왜 주차장에 들어서려 하지 않았을까. 여러 행사나 공원을 다니며 쌓은 학습 효과일 수 있겠다. 헛걸음인 적이 많았다. 길가의 차도 주차장이 가득 찼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길가에 주차하면 나들기가 수월하다. 결국 길가 주차가 더 지혜로운 선택이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다. 지혜로운 선택이 어리석은 결과를 낳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느 심리학-행동경제학 연구가 ‘사람이 잘못된 의사결정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무능해서가 아니라 환경의 영향으로 정신적인 여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Delloitte Anjin Review <No.8.> 2016). 중요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부족함이 느껴지면 그것에 온통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세상과 상황을 근시안적으로 보게 되며, 눈앞의 이익을 즉각적으로 취하려 하게 되고, 합리적인 상태로 되돌아오는 마음의 회복을 방해받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은 눈앞의 작은 이익에 쉽게 무너진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눈앞의 기회를 놓치면 오랜 시간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눈앞의 작고 사소한 가치가 먼 미래의 크고 중요한 가치를 이기게 된다. 눈앞의 확실한 이익에는 더 민감해진다. 당랑규선(螳螂窺蟬), 견리망진(見利忘眞), 무견소리(無見小利)는 훌륭한 경구(警句)이나 눈앞의 불편함을 피하고 싶고 확실한 이익을 붙잡고 싶은 마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미 충분히 사나운 사회문화 속에서 NFC에서나 들었음 직한 베틀, 데스매치라는 단어들을 경쟁 피라미드와 결합하여 승자독식 패자 영멸의 긴박감을 조장하고 음식 만들기는 물론 연예, 사랑(커플 만들기)까지 녹여버리는 매스컴이 갈수록 힘을 키워간다. 우리가 경쟁의 게임 트랙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물론, 그것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슬프고 불가피한 경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인생은 하나의 경주라는 것은 슬픈, 그러나 불가피한 사실’이라며 ‘다만 이 불가피한 경주가 앞만 보고 달리면 깃대는 저절로 따라와 주는 경주가 되기를 오로지 염원’(김태길, <경주>)하는 수필가는 참으로 소박하다. 앞의 연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려면 여유를 회복하라고 조언한다. 관련된 정보를 미리 얻으면 사고(思考)의 무너짐을 예방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약간의 회복 또는 위기의 지연일 뿐, 빠져나오는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일단 TV를 껐다. 침묵이 내리자 갑자기 텅 비어버린 듯한 방 안으로 무료함과 어색함, 불안한 기분이 밀려온다. 그것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억지로 그 불편함 속에 앉아 있어 볼 생각이다. 나를 어리석게 만든 책임을 누가 져야 할지 더 따져야 하겠으나, 지금은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듯하여 잠시 덮어두려 한다. 내게도 어느 만큼은 책임 있어 보이기도 하다.

                                                                                                                                       <2021.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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