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정의를 부탁해] ① ‘괴물’을 낳는 한국의 명문대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보며 아내가 말했다. “에휴, 서울대 의대가 뭐라고 저 난릴까. 아이 의대 보내려고 돈 수십억을 쓰고 엄마가 자살까지 하고...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그러던 아내가 5분 후 다시 말했다. “근데 스카이캐슬 저 집 진짜 좋다. 인테리어도 고급지고, 염정아 귀걸이도 너무 예쁘다. 나도 저런 데서 살고 싶다.” 그 장면에선 주인공 한서진(염정아 분) 집에 걸린 김종숙 작가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산수화’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나 역시 아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겉으로는 욕하면서도 속으로는 닮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 이처럼 대중의 이상과 욕망 사이에 자리한 이 틈을 교묘히 파고든 게 이 드라마의 인기 비결아닐까. 학벌문제와 입시교육을 꼬집는 데 기획의도가 있었을 것이 분명한 이 드라마를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더 강렬하게 열망하게 됐을지 궁금하다. 실제로 요즘 학원가에는 ‘스카이캐슬반’이 생기고 드라마처럼 입시 컨설팅을 해준다는 광고가 유행이라고 한다.
드라마는 고급 주택단지 스카이캐슬에 사는 0.1% 상류층 인사들이 자신의 부와 명예, 권력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일류대 입시에 모든 것을 바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곳은 명문 사립대 병원 의사와 로스쿨 교수만 입주할 수 있는 폐쇄적 주거지로, 주민들의 최대 목표는 자식이 ‘적어도 나만큼’ 살거나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 욕망 때문에 ‘사이코패스’ 입시 코디네이터를 고용하고, 복잡한 가정사를 수습하지 못해 파국 위기에 이르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덕분에 드라마는 종편으로서는 드물게 시청률 20%를 가뿐히 넘으며 화제를 낳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스카이는 우뚝 솟은 ‘성채(castle)’다. 스카이라는 최고의 학력·학벌 자원을 얻으면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릴 가능성이 크다는 기대가 여전히 존재한다. 저성장·고실업 시대를 맞아 명문대 출신의 생존경쟁도 녹록치 않은 게 현실이지만, 이들이 적어도 어디 가서 노골적 차별과 배제를 겪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은 견고하다. 바꿔 말하면 소수 명문대 출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더 크게 벌어진 사회 격차 속에서 패배자·낙오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스카이는 여전히 최고의 ‘간판’이자 ‘보험‘이다.
그런데 이렇게 선망 받는 스카이 출신 엘리트들은 개인의 욕망과 목표를 이루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의 공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는 얼마나 기여하고 있을까? 개인이 스카이에 진입하는 순간 엘리트 또는 지도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열리며, 실제로 우리 사회 엘리트층의 절대 다수는 스카이 출신이다. 대중은 이런 엘리트들이 뛰어난 지식과 능력을 바탕으로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비판하고 해결함으로써 보통 사람이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살도록 기여해주길 기대한다. 스카이가 내세우는 교육이념 역시 ‘진리는 나의 빛(서울대)’ ‘진리와 자유(연세대)’ ‘자유, 정의, 진리(고려대)’로 엘리트로서의 공공적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법조계, 관계, 재계, 학계, 언론계 등 주요 영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부패와 부조리를 보면 한국 엘리트들이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의식 면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특히 지난 ‘이명박근혜’ 정부의 실정과 국정농단 사태 속에서 최고의 학교를 나온 최고위 지도층이 적극적으로 하수인 노릇을 한 것이 드러나며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른 바 있다. 촛불집회 현장에선 “썩어빠진 엘리트는 필요없다”고 적힌 대형 깃발이 휘날렸고, “어제의 엘리트가 오늘의 적폐”라는 말까지 나왔다. 촛불혁명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계속되는 엘리트들의 ‘파파괴(파도 파도 괴담)’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다.
한국은 스카이 출신 엘리트들이 각 분야의 주요 자리를 꿰차고 있는 ‘스카이 공화국’이지만, 그들의 대한 대중의 신뢰도는 낙제점이다. 먼저 한국 사회 핵심 분야의 스카이 집중도를 살펴보자. 법조에서 스카이 출신은 전체 판사의 80%(2015년 대법원 자료), 검사의 70%(2014년 법무부 자료)를 차지한다. 행정부에선 차관급 이상 고위공무원 중 스카이 출신이 67%(2017년), 입법부에서는 20대 국회의원 중 스카이 출신이 47%에 달한다. 재계에서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 중 스카이 출신이 44.8%(2018년 CEO 스코어 조사), 언론계는 25개 언론사 주요간부 중 스카이 출신이 75%(2014년 <미디어오늘> 조사)에 이른다.
그러나 국민들은 스카이 출신 엘리트들이 대거 진출해 장악하고 있는 이들 기관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17년 사회통합 실태조사에 나타난 국민들의 기관별 신뢰도를 보면 국회가 15%로 조사 기관 중 꼴찌였고, 대기업 31%, 검찰 31%, 법원 34% 등 주요기관이 모두 바닥권이다. 중앙정부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41%로 상승했지만, 지난 2016년 조사에서는 25%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매년 실시하는 사회신뢰도 조사에서 최상위권인 스위스, 덴마크 국민들의 정부, 사법부 등 공공기관 신뢰도가 70~80%인 것과 대조된다.
언론 신뢰도 역시 참담한 수준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영국 옥스퍼드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와 함께 발간한 ‘디지털뉴스 리포트 2018’에 따르면 우리나라 뉴스 신뢰도는 조사 대상 37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거의 항상 대부분의 뉴스를 신뢰한다”는 항목에 핀란드 국민은 62%가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우리나라 국민은 25%에 그쳤다.
미국 콜게이트 대학 마이클 존스턴 교수는 이런 한국을 ‘대표적인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 국가’라고 표현했다. 사회 엘리트층이 자기네끼리 특권의식을 가진 ‘신성가족’을 이루고 인맥과 연줄을 통해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는 것이다. 한국 제일의 엘리트 양성소인 스카이는 한국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 사회에는 스카이를 부러워하기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란 한국의 이기적 엘리트와 그런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 시스템, 그리고 입시경쟁을 부추기는 지배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말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스카이가 정점이 되는 피라미드 구조를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순간, ‘성공을 향한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류•삼류 인생’이라거나 ‘열등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방해꾼’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대학사에는 이미 그런 용기를 보인 사람들이 있다. 멀게는 4.19 혁명 때 독재자의 부정선거에 대항해 수업을 거부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엘리트 대학생들이 있고, 군부 독재 치하에서 졸개 노릇을 할 수 없다며 고시를 포기하고 ‘대학생 친구’가 필요한 공장과 농촌으로 달려갔던 인재들이 있다. 가까이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라는 명문을 남기고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 씨가 있고, 대학이 자본(대기업)의 꼭두각시가 되는 모습을 보고 “정의가 없는 대학은 대학이 아니”라고 외치며 중앙대를 떠난 김창인 씨가 있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의 ‘부끄러움’ 릴레이도 기억할 만하다. 서울대 학생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부끄러운 동문상 설문조사’를 벌이고 ‘최악의 동문상’ 1위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대한민국 헌정사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친 동문을 선정하는 ‘멍에의 전당’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꼽았다. 연세대도 최악의 동문상으로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대표 친박),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민중은 개돼지" 발언) 등 5명을 뽑고 선배들의 실정을 조롱했다. 고려대에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뇌물과 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된 후 교내 ‘이명박 라운지’의 이름이 창피하다며 바꿔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밖에도 여러 시국선언을 통해 서강대생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동문으로서 정말 부끄럽다”), 이화여대생들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이대의 현주소에 개탄한다”), 성균관대생들은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차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워했다.
모두가 선망하는 스카이 출신의 엘리트. 가장 명석한 두뇌로 누구보다 공부도 잘하고 열심히 살아왔던 이들이 왜 이렇게 사회적 신뢰를 잃고 적폐로 여겨지게 되는 걸까? 이들이 원래 인성이 나쁘고 ‘사이코패스’ 기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엘리트를 교육하고 선별하고 양성하는 구조 자체에 있다. 스카이를 향한 경쟁식 입시교육, ‘줄세우기’를 통한 획일적 인재 선발, 상류층의 교육을 통한 계급 대물림 등 문제투성이인 교육 시스템에서는 개인이 각별히 정신을 차리고 저항하지 않는 한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이고 공공적 책임을 망각한 인재로 길러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는 주변의 광기어린 ‘입시 부조리극’을 파헤치는 동화작가 이수임(이태란 분)이 벨기에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의 책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를 탐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극심한 경쟁과 성과주의가 개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뒤집어 놓아 극단적 이기주의자, 즉 괴물을 만든다고 분석한다. 페르하에허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윤리와 사회가 ‘시장’에 복종한다”며 공적 가치가 훼손된 대표 사례 중 하나로 ‘지식 공장이 된 대학’을 꼽았다.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한국 사회는 지옥 같은 입시전쟁과 점수 몇 점에 목숨을 거는 교육제도로 아이들을 괴물로 만드는 극단적인 사례다. 제대로 배운다면 투철한 공적 사명과 책임감을 지닌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인재들, 남다른 개성과 재능으로 성취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학생들이 한국 교육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획일화한 부모의 욕망과 사회의 주문에 복종하는 존재로 굴절되고 만다. 이런 교육은 불의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스카이의 화려한 겉모습을 부러워하는 대신 그 속의 거대한 불의를 부끄러워하는 용기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