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정의를 부탁해] ② 실패한 교육이 낳은 나쁜 인재들
“한국은 일반 사람들 수준은 높고 엘리트가 낮다.” (김영민 서울대 교수, 조선일보 인터뷰)
“잘난 사람,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 권력자들일수록 타인의 고통과 불운에 대한 무관심 내지 둔감성이 유별나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편집인, 경향신문 칼럼)
“법과 의료, 종교, 경제, 사회, 문화단체의 수장들 중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전우용 역사학자, 페이스북)
“그들은 우리 기대를 저버리고 자본, 권력과 결탁해 제 배를 불리는 데만 힘썼다.” (조영학 번역가, 서울신문 칼럼)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한국 엘리트를 보면 한국 교육을 안다. ‘스카이’(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명문대를 나와 어려운 고시나 공채를 거쳐 사회를 좌우하는 위치에 오른 엘리트, 그들이 바로 한국 인재양성 시스템이 맺은 열매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준이 낮고’ ‘제 배만 불리고’ ‘타인의 고통과 불운에 무관심하며’ '존경할 수 없는' 엘리트를 길러낸 한국 교육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각 분야 엘리트들은 조직 특유의 생리와 문화에도 영향을 받지만, 그 전에 제도권 교육을 거치며 일찌감치 태도와 가치관을 형성한다.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은 저서 <대한민국의 시험(2017)>에서 “한두 명이나 한두 분야가 아니라 온갖 분야에서 사회지도층의 비리가 일어난다면 나라 전체의 구조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며 “그 한 축에는 인재양성과 선발을 담당하는 교육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교육이라는 ‘썩은 나무’가 한국 엘리트라는 ‘상한 열매’를 맺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 교육은 대체 뭐가 잘못됐을까? 가장 큰 문제는 경쟁과 서열 중심의 입시교육에만 치중해 도덕성과 정의감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교육의 본래 역할은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데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육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오로지 ‘좋은 대학’을 목표로 경쟁하는 ‘점수 기계’를 찍어내는 데 치우쳐 있다.
핀란드 등 ‘협력’을 강조하는 교육 선진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우리 교실의 성적 경쟁은 유별나고 지독하다. 상위권 학생은 성공을 향한 욕망으로 ‘인정투쟁’에, 중하위권 학생은 낙오에 대한 공포 속에 ‘생존투쟁’에 뛰어들어 앞만 보고 달린다.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는 없다. 학창시절 내내 옆 친구와 점수, 등수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만 했던 아이가 적절한 공감능력과 이타심을 갖추고 사회정의와 공공적 책임에 헌신하는 인재로 성장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철학자 김상봉은 <학벌사회(2004)>에서 “한국의 교육은 학생들을 공동체의 복리와 정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성숙한 인간으로 기르지 못하고 그저 자기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점수 1~2점에 죽고 사는 비루한 인간들을 길러낼 뿐”이라며 ‘전인교육의 붕괴’를 한탄했다. 특히 상위권 학생일수록 경쟁자의 정체가 명확하고 대립관계 역시 분명하기 때문에 언제나 ‘경쟁자의 실패를 바라는 부도덕한 심리상태’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하게 된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처음으로 한국의 학벌문제를 깊이 분석한 이 책이 나온 지 15년이 지났지만, 피 튀기는 입시전쟁은 그동안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한 발짝도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 교육의 또 다른 문제는 주입식·암기식 학습으로 비판적 사고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스카이 대학에 진학하는 우등생들은 이른바 ‘공부의 신’이지만, 그 공부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보다는 주어진 정답을 수용하는 행위에 가깝다. 이혜정 소장이 서울대에서 4.3 만점 중 4.0 이상을 받은 최우등생의 공부 방법을 심층 분석한 책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2014)>를 보면 이들의 비결은 놀랍게도 ‘교수님의 말씀을 전부 받아 적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 교수의 말을 ‘농담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다 적는다는 최우등생이 전체 인터뷰 응답자 46명 중 87%에 달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수와 의견이 다를 경우 90%의 최우등생이 자신의 생각을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교수님이 저보다 경험도 많고 연구도 많이 했으니까 교수님 의견이 더 타당한 게 사실이잖아요?”라며 “내 견해보다 학점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이 소장이 서울대와 미국 미시간대 학생들의 학습전략을 비교 연구한 바에 따르면, 서울대 학생들은 교수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최대한 그대로 흡수하려고 하는 반면, 미시간대 학생들은 교수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교수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수재들의 수동적·수용적 학습 전략의 결과는 무엇일까? 성공을 위해 ‘주어진 정답’에 무조건 순응하는 태도는 권력자의 불합리한 지시나 조직의 부조리한 문화에도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복종하는 한국 엘리트의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그들에게 윗사람의 말씀은 자기 보신과 입신을 위한 ‘정답’이다. 한국 사회에선 이렇게 ‘정답 맞히는 능력’을 잘 갖춘 사람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지도층 행세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없는 엘리트는 ‘국정농단’과 ‘재판거래’ 등에 협력한 관료와 법관들처럼 결국 권력과 자본에 이용당하는 불의의 도구가 될 뿐이다.
승자에게 과도한 보상을 주고 특권의식을 갖게 하는 것 역시 한국 교육의 심각한 문제다. 고등학교에선 상위권 학생들을 ‘될 놈’으로 구분해 내신 성적과 상장 등을 ‘몰아주기’ 한다. 단 하루 시험으로 평가하는 수능을 잘 치러 명문대에 진학한 고득점자에게는 사회적 인정 등 유무형의 보상이 평생 동안 따른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전근대적 인재선발 제도인 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단숨에 중견급 공직자로 신분이 수직 상승해 대중 위에 군림한다. 공채라는 획일화된 선발 절차를 뚫은 자 역시 높은 연봉과 정규직의 안정성을 누리며 탈락자와 ‘구분 짓기’를 당연하게 여긴다.
한국이 압축성장하는 가운데 철저히 효율성을 추구한 ‘수능-고시-공채’는 응시자의 역량과 개성, 도덕성과 공감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제도지만 ‘단 한 번 시험으로 인생을 좌우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어려운 시험 하나를 통과해 과도한 보상을 받은 엘리트들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특권과 지위를 ‘실력과 노력의 결과’라며 당연하게 여긴다. 또 자신을 다른 이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선민의식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한다. 나아가 공적 지위를 사익 추구를 위해 남용하기도 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2016년 한 칼럼에서 “고시제도가 일종의 특권 지위를 보장해주는 국가공인 특허권 획득 경쟁이기 때문에 지망자들의 사적 욕망이 공공심을 압도하며 결국 국가를 사익추구의 장으로 만든다”며 “요즘 세상의 지탄을 받는 ‘고위 공직자’들은 바로 고시제도가 만들어낸 ‘괴물’이자 어쩌면 이 제도의 희생자”라고 지적했다. 최근 로스쿨과 국립외교원의 도입으로 고시 자체는 사라지고 있지만, 한국식 ‘시험’을 통한 인재선발은 여전하다.
“더 빨리! 더 빨리! 자,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주변 세계가 다 움직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고, 끊임없이 달려야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다른 곳에 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달려야 한다. 한국의 교육 현실도 이와 같다. 경쟁적·수동적·획일적인 ‘이상한 교육’에 가만히 순응하면 어느새 이기적이고 불의에 굴복하며 특권의식에 젖은 ‘이상한 엘리트’가 되고, 제 정신을 차리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겨우 정상인 범주에 들 수 있다. 조금 더 정의롭고 이타적인 인재가 되려면 권력과 조직에 저항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아주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교육은 불의하다. 우리는 유별나게 용감하지 않은 보통 사람도 믿음직한 교육 시스템에서 충실히 공부하면 조금이나마 사회가 성숙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정의로운 인재’로 성장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한국 교육이라는 ‘썩은 나무’를 뿌리부터 소생시킬 혁신적인 변화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