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위기와 혁신] 불공정한 취업전쟁 - 취업 이후 차별 피라미드
영국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와 미국의 하버드 등 선진국 명문대학은 대부분 수도가 아닌 지방의 작은 도시에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지방에 있는 대학을 교육의 품질과 상관없이 '지잡대' 등으로 싸잡아 부르며 멸시하고 차별하는 풍토가 심하다. 지방대생들이 편입 등을 통해 서울로 '탈출'하는 행렬도 끊이지 않는다. 서울 중심의 불균형 발전과 왜곡된 학력 경쟁 등이 낳은 지방대 소외의 실상을 조명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 & <단비뉴스>
경남지역 국립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디자인 회사 3곳을 다니다가 현재 고향 창원에서 개인 공방을 운영하는 김소진(37, 가명)씨는 지방대를 나와 중소기업에서 일하며 저임금•저복지를 받는 설움을 10여 년간 톡톡히 겪었다고 말했다.
"처음 들어간 의류 디자인 회사는 월급을 120만 원밖에 주지 않았어요. 매일 밤늦도록 일해도 야근 수당이 없었고, 휴가도 1년에 3일 정도밖에 쓰지 못했어요. 2년 뒤 옮겨간 방송 디자인 회사 역시 대기업 계열사인데도 월급은 130여만 원에 불과했고 밤새워 일해도 (수당은커녕)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듣기 어려웠죠. 마케팅홍보 회사에선 2천만 원 중반대의 연봉을 받았지만 상여금, 자기계발 지원, 육아휴직 등의 직원 복지는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어요."
김씨는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이 대기업에 들어가 초봉 4천만~5천만 원씩 받고 다양한 복지혜택을 누리는 것을 보면 '그들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더 힘든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격차가 더욱 커져 아무리 애를 써도 좁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대구의 사립대를 나와 지방은행에서 3년째 일하는 현승용(26•가명)씨는 입사 초기 지역 국립대를 나온 상사로부터 “이 회사에 여태껏 이런 학벌로 들어온 애가 없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업무를 하다 실수를 했을 때도 그 상사는 과거 다른 실수까지 들먹이며 유난히 심한 모욕을 주기도 했다. 현씨는 “직원 대부분이 지역에서는 서열이 높은 대학 출신”이라며 “학벌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눈치 보며 회사생활을 하니 몸과 정신이 많이 피폐해지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승진을 하려면 진급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기준이 80점이면 나는 90점 이상을 맞아야 한다”며 “점수가 간당간당하거나 다른 사람과 동급이면 떨어뜨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지방대 출신에 대한 차별과 소외는 채용단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취업 관문을 통과한 이후에도 이어진다. 임금, 배치, 승진, 이직은 물론 사내 인간관계 등 직장생활 전반에 걸쳐 출신학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며 '차별 피라미드'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학벌문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공공기관 첫 보고서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노동시장 신호와 선별에 기반한 입시체제의 분석과 평가(2012)>에 따르면 조사 대상 약 8700명 중 일자리에서 차별을 경험한 사람이 15.3%였고, 이 중 절반 정도가 취업(43.8%), 임금(47.5%), 승진(49.1%), 사회생활(47.2%) 등에서 학력·학벌 차별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성차별(15~26%)이나 연령차별(7~30%)보다 높은 수치로, 노동시장에서 출신학교 차별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방대 졸업생이 노동시장에서 가장 크게 맞닥뜨리는 격차는 취업 단계에서 이미 상대적으로 '나쁜 일자리'로 밀려나고 그에 따라 낮은 임금과 처우를 받으며, 이것이 평생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국고용정보원 안준기 연구위원이 <대학 과잉교육에 따른 노동시장 양극화에 관한 연구(2015)>에서 대학 서열에 따른 취업 유형을 분석한 결과, 언론사 평가 1~10위 대학 출신 취업자 중 계약 기간 1년 이상 상용직 취업률은 93%였지만 지방대가 대부분인 30위 이하 대학 출신은 이 비율이 82%로 떨어졌다. 또 1~10위 대학 출신이 직원 300인 이상 기업에 취업한 비율은 75%였지만, 30위 이하 대학 출신은 41%에 그쳤다. 졸업 대학 순위가 떨어질수록 고용 안정성이 높고 규모가 큰 기업에 취업할 확률이 낮아지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임금 격차로 이어진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오호영 연구위원이 <청년층 취업난의 원인과 정책과제(2015)> 보고서에서 임금근로자 전체의 대학 서열에 따른 임금 격차를 분석한 결과, 언론사 평가 1~10위 대학 출신 근로자의 월평균 중위임금은 290만 원인 반면 21위 이하 지방대 출신의 월평균 중위임금은 180만 원에 불과했다. '중위임금'은 전체 근로자를 임금 기준으로 1위부터 최하위까지 줄 세웠을 때 가장 중간에 있는 사람이 받는 임금을 말한다.
지난 1월 한국방송(KBS)과 한국리서치가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혐오와 차별' 여론조사에서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차별로 '학력 및 학벌 차별'을 꼽은 사람(33%)이 가장 많았다. 특히 학력 차별에 따른 '임금 격차'에 대해 응답자 4명 중 3명이 '큰 편이다' 혹은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오호영 위원은 15일 <단비뉴스> 이메일 인터뷰에서 "출신 대학에 따른 임금 격차는 근본적으로 서열화한 대학과 이를 기반으로 직원을 뽑는 대기업의 채용 관행이 맞물려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 노동시장에서는 소수 대기업과 다수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 복리후생, 근로조건 격차가 크고 경력직 이동도 활발하지 않아 처음에 대기업에 입사하느냐 중소기업에 입사하느냐에 따라 사실상 생애 소득이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신 학교에 따른 취업 및 임금 격차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이이므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노동시장 신호와 선별에 기반한 입시체제의 분석과 평가> 보고서의 공동 저자인 서강대 김영철(44, 경제학) 교수는 이에 대해 "한쪽만 바라보는 단순한 시각"이라고 말한다.
김 교수는 지난 1일 <단비뉴스> 전화 인터뷰에서 "학벌과 노동시장 성과에 관한 여러 연구를 보면 실력이 같아도 대학서열이 낮으면 입사·연봉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등 출신학교에 따른 '통계적 차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동시장에서 나타나는 격차를 단순히 실력 차이로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가 실력에 따른 차이이고 차별에 따른 차이인지 더 치밀하게 분석해 격차를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제학에서 통계적 차별이란 고용주가 개인의 역량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을 때 인종·성별· 출신학교 등 제한된 정보를 활용,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우수하다는 기존의 경험과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차별적 평가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차별당하는 집단은 실력을 갖추더라도 충분한 기회와 보상을 얻지 못하고, '해도 안 된다'고 낙담하면서 자기계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악순환을 겪는다.
일자리에서의 통계적 차별은 임금뿐만 아니라 직장 내 소외와 배제 등으로도 나타난다. 지난 5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신원이 확인된 제보자를 통해 수집한 '직장 상사의 막말과 모욕 사례'를 보면 출신학교에 대한 차별과 비하가 수두룩했다. 한 직장 상사는 "그 직원은 어느 대학을 나왔냐? 업무를 못 하는 이유는 대부분 지방대를 졸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떤 중소기업 간부는 직원이 최저임금보다 적은 급여에 대해 문의하자 "(연봉을 더 주면) 네 경력에 말이 되냐, 학교 어디 나왔지"라며 모욕을 주었다.
서울대 공대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대기업을 거쳐 또 다른 대기업으로 이직한 조희용(가명)씨는 전·현 회사에서 지방대 출신을 무시하는 상황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털어놓았다. 한 명문대 출신 상사는 업무 실수를 한 지방대 출신 사원에게 "이래서 사람은 가방끈이 길어야 해"라고 말했다. 다른 상사는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지방대 출신을 제외하기도 했다. 평소 '학벌로 뭉치지 마라' '사조직 만들지 말라'고 강조하던 부장은 한 명문대의 사내 총동문회 총무로 활동하고 있었다.
조씨는 "회사에서 스카이(서울·연세·고려대) 출신 석·박사 등 학력·학벌이 좋은 사람일수록 가방끈(학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기대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을 때는 특정 한 사람의 역량이 떨어지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나도 출신학교로 역량을 판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지방대 꼬리표는 이직 때도 발목을 잡는다. 충북의 한 사립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미디어 관련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영재(35, 가명)씨는 지난해 같은 업계 회사에서 이직 제의를 받았지만 최종 단계에서 지방대 출신이라는 '학벌'에 걸려 성사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 회사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듣게 되었다. 이씨는 3년 전에도 이직을 위한 면접 자리에서 "나는 지방대생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회사 대표를 만난 일이 있다. 그 대표는 이씨 면전에서 "경험상 지방대 출신들은 대체로 성실하지 않더라"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할 말이 없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자리에서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도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죠. 주변에선 대학원에 가라고 조언해요. 전문성을 기르란 의미가 아니라 성공하려면 '학벌 세탁'이 필수라는 얘기죠."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김은종(41) 선임연구원은 지난 15일 전화 인터뷰에서 "지방대생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절대다수의 지방대 출신이 취업할 때뿐만 아니라 취업 이후에도 업무, 승진, 배치 등에서 지속적인 차별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대학서열에 따른 차별적인 프레임 자체를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출신학교 서열을 실력 차이라며 차별을 정당화하는 현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김영철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일자리의 격차가 과도하게 크고 좋은 일자리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대학 입시 단계에서 이미 결정되어 버린다"며 입체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일자리 격차를 줄여나가는 노력을 지속하면서 대학서열 완화를 통해 인재들이 여러 대학에 골고루 퍼지도록 하고, 대학입학 이후 높은 성취를 보인 인재가 노동시장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방향으로 입시 및 채용 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력의 배신> 저자인 광주교대 박남기(59, 교육학) 교수는 2일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에서 절대적인 믿음으로 퍼져 있는 '실력주의'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성취라는 이유로 승자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보상과 패자에게 주어지는 극심한 차별을 당연하게 여긴다"며 "실력주의가 가져온 불공정과 불평등을 직시하고 그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력은 순전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갖춰지는 게 아니라 타고난 능력과 집념과 같은 '천부적 운', 부모의 경제·사회적 지위와 같은 '사회적 운', 그밖에 뜻밖의 행운과 같은 여러 가지 실력 요소가 뒤섞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엘리트나 큰 이익을 얻은 대기업은 과도한 보상을 당연시할 게 아니라 자신의 성취를 사회 또는 타인과 적극적으로 공유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활력을 위해 어느 정도 차등은 있어야겠지만 지금처럼 승자독식에 따른 극심한 격차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반드시 줄여나가야 합니다."
박 교수는 "지방대를 나와 중소기업·비정규직에 가거나 중상층 이상이 어떤 계기로 계층 사다리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이익공유, 복지 확대, 사회안전망 확충 등을 통해 충분히 행복하고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며 "그래야만 한국 사회의 지독한 학벌 전쟁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 임지윤, 권영지, 저널리즘연구소 임형준 연구원과 함께 취재하고 집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