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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영신 Jan 25. 2019

[이전글] 장하성 교수의 솔직한 고백, 공포스럽다

[서평] 기성세대 역할 따지게 되는 장하성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

<오마이뉴스>, 2016년 1월 28일 게재.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왜 분노해야 하는가>(헤이북스, 2015년 12월 발간)에서 한국 사회 불평등에 대해 묻고 답하는 바는 매우 명쾌하다.

첫째 질문, 왜 불평등해졌는가? 답, 재산의 격차보다는 '소득(임금)의 격차'가 커졌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중소기업 임금은 대기업의 60%에 불과하다. 

둘째 질문,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 사후 재분배를 통한 교정보다는 '원천적 분배'의 불평등을 바로잡아야 한다. 곧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성과를 다 가져간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을 활용하거나 대기업 노조가 대승적으로 임금 조정에 참여하는 방법 등을 모색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이 책은 이러한 생각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무려 67개의 통계와 그래프를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셋째 질문, 그렇다면 이토록 불평등한 사회를 과연 누가 바꿀 수 있는가? 이 물음의 정답 역시 명쾌하다. 그 주인공은 바로 '청년'이다. 

"재벌 대기업에게 함께 잘사는 보다 평등한 한국으로 만드는 기적을 바랄 수도 없고, 기성세대에게 세상을 바꿀 것도 기대할 수 없다면 누가 한국을 바꿀 것인가? 바로 미래의 주인이 바꿔야 한다. 20대와 30대로 정의한 청년세대 또는 젊은 세대만이 지금의 한국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답이 이 책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왜 분노해야 하는가>, 37쪽)

또다시 호명된 한국 청년들

▲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책 <왜 분노해야 하는가> ⓒ 헤이북스


1998년 IMF 외환위기와 잇따른 신자유주의 정부를 지나며 한국 사회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는 평가가 내려진 이후, 이 땅의 청년들은 줄기차게 '미래의 해결사'로 호출됐다. 2007년 우석훈·박권일은 <88만원 세대>에서 청년들에게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조언했다. 2009년 김용민은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 칼럼에서 "이미 너희는 뭘 해도 늦었다"며 '20대 개새끼론'의 불씨를 지폈다(이 역시 청년들에게 '뭘 좀 해보라'는 말의 과격 버전에 다름 아니다). 

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2010년 김난도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힐링'을 선물하고 '노오오오력'을 응원했다. 다시 2015년 강준만은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에서 '종이짱돌(투표)'을 변화를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 사이 언론들도 '삼포세대', 'N포세대', '달관세대' 등 경쟁적으로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끊임없이 한 마디씩 훈수를 뒀다. 그러나 이런 흐름 속에서도 청년을 주축으로하는 거대한 움직임이나 변화가 보이지 않자 청년담론은 어느덧 별 재미없는 '낡은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장하성 교수는 식상함을 무릅쓰고 '청년'을 '또다시' 호명하고 나섰다. 그는 오늘날 청년들이 희망이 없는 사회 속에 살면서도 "'긍정적 노예의 행복', 포기가 만들어낸 '아픈 행복'이나 '위장된 행복'"에 안주하고 있다며, "깨어나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실로 오랜만에 청년들을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메시지다. 실제로 장 교수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책을 "선동으로 봐도 좋다"고 밝혔다. 

장 교수의 용기 있는 '재탕'에 덩달아 자신감이 생긴 걸까? 새해 벽두부터 몇몇 언론도 다시 청년에 관한 특별기획 기사를 들고 나왔다. 

<경향신문>은 '창간 70주년 기획'으로 '부들부들 청년'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첫 회부터 "우리는 붕괴를 원한다"는 충격적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도하며 심층적으로 한국 사회 청년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다. 

<한겨레> 역시 '청년에게 공정한 출발선을'라는 시리즈를 연재 중이다. <한국일보>는 '한·중·일 청년 리포트'라는 인터랙티브 디지털 콘텐츠 통해 '취업·창업', '주거', '결혼', '관계' 등 네 분야에 대해 3개국 청년 38명의 인터뷰를 선보였다. 

웬일인가, 갑자기 쏟아지는 청년에 대한 과도한 주목은. 장 교수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서부터 다시금 시작된 특별한 관심에 과연 청년들은 감사해야 하는 걸까? 


청년이 미래의 답? 진짜루~?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자. 저자가 경영·경제학자로서 치밀하게 한국 사회 불평등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한 1~2부에 비해, 갑자기 사회학자 또는 멘토로 변신해 '청년들이 나서야 한다'고 말하는 3부는 상대적으로 짜임새가 치밀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그가 청년을 대상으로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해 조언하는 내용은 꽤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다. 

가령 그는 "대기업과 금융기업이 임시직인 '인턴'으로 신입 직원을 뽑은 후 이 중에서 다시 선별하여 채용하는 잔인한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며 청년들이 "한국식 인턴 제도의 폐지를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지속되는 업무에는 비정규직을 폐지하고 정규직을 채용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해야 한다", "보육을 100% 국가가 책임지도록 30대가 앞장서 요구해야 한다", "초등학생 부모들이 함께 선행 학습 안 시키기 운동을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실현하기 위해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연결되는 다원화된 조직과 결사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20대는 인턴제도 폐지 모임을 만들고, 30대는 선행 학습 없는 세상 만들기 부모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청년유니온', '알바노조(알바연대)' 등을 "청년세대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스스로 이루어낸 조직적 사례"라며 격려하기도 한다. 

청년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걱정, 그리고 높은 식견에서 나온 이러한 조언들은 분명 귀 기울일 만하다. 청년들이 저대로만 해준다면 한국 사회가 정말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미래는 젊은이들의 것"이라는 한 마디는 왠지 청년들의 가슴을 시리게도 하고 들끓게도 할 듯하다. 이 책의 큰 미덕이다. 

청년들이 바꿔라, 우리는 막을 테니
            

▲  장하성 교수가  '뉴스룸'에 출연해 손석희 앵커와 인터뷰 하는 모습ⓒ 방송화면 캡처


그러나 이 책 전반에 나타나는 의미 있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응전'하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함이 느껴진다. 청년들에게 이 사회의 모든 짐을 지우고 정작 기성세대는 그 부담에서 빠져나가려는 의도가 몇몇 문장에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관찰력과 무의식이 만들어낸 그 표현에는 오늘날 많은 기성세대의 속마음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 말이다. 

"기성세대는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다. 변화는 기성세대에게 불편한 것이다. 세상을 바꿀 현실적인 힘을 기득권 세력이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세상이 바뀌면 손해를 볼 것이기에 오히려 변화를 가로막고 저항한다. 기성세대는 자기 자식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부릅뜨지만 자식 세대의 미래에는 눈감고 있다. 기성세대는 무책임하다. 자식 세대에게 희망 없는 구조를 만들어 준 것도 무책임하고, 자신들이 만든 잘못된 구조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도 무책임하다. 청년세대가 세상을 바꾸려고 하면 박수 쳐주고 응원해주지도 않을 것이다."(399~400쪽)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수없이 많다. (...) 그런 것들을 찾아내서 기성세대에게 요구하고, 사회적 이슈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은 청년세대의 몫이다. 변화에 부정적인 기성세대를 설득해서 함께 세상을 바꾸는 것도 청년세대의 몫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에게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도 청년세대의 몫이다." (409~410쪽) 

물론 이런 문장들은 청년세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들 마음에 보다 뜨거운 불을 지르기 위한 장치일 수 있다. 또 전체 책 내용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러나 저 '짧지만 긴' 말은 책을 읽는 청년들에게 '분노하고 저항하라'는 메시지를 송두리째 잊게 만들 만큼 '막막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저 문장이 말하는 내용이 '지독하게도'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며, 청년들 또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성세대는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다", "변화에 부정적인 기성세대를 설득해서 함께 세상을 바꾸는 것도 청년세대의 몫"이라는 솔직한 자기 고백은 곧 청년들로 하여금 죽을 것을 알고도 뛰어드는 '가미가제'가 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청년더러 '분노하고 저항하라'고 외치는, 그러니까 꽤 청년들의 미래를 걱정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성세대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먼저 대학교수들에게 묻고 싶다. 만약 당신 밑에서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이 비정규직 강사에 대한 비정상적인 처우에 분노, 저항하며 정규직 교수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대학 교원 시스템을 완전히 재편하자고 요구한다면,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텐가? 

언론사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만약 수습기자가 반인권적인 '사스마와리(경찰서 취재)'나 폐쇄적인 '출입처 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기존의 수습교육과 취재관행을 개선하자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텐가? 

정당 정치가들에게 묻고 싶다. 만약 청년당원이 의원, 핵심 당직자의 고령화로 젊은 세대의 민의가 반영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적극적으로 일정 수준의 지분을 요구하고 나서면 어쩔텐가?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묻고 싶다. 만약 막내 간사가 터무니없는 임금과 노동 강도에 불만을 표하며 임금인상과 칼퇴근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면?

소위 청년의 편에 서있다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막상 저 상황에서 자신 있게 청년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까? 그들의 분노와 저항에 적극 동참할 수 있을까? 그들마저 여기에 "그렇다"라고 답하지 못한다면, 청년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거나 적대적인 이들은 더 말해 무엇 할까?

정리하자면 이렇다. 장하성 교수의 고백은 너무나 솔직해서 공포를 느끼게 한다. 기성세대는 '정말로'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뭉뚱그려 실체가 불분명한 청년세대의 분노와 저항은 이해할지 몰라도, 막상 자기 밑에서 실존하는 청년의 분노와 저항은 깔아뭉갠다. 

박근혜 정부나 보수세력 등 자기 가치관과 반대되는 기득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응원할지 몰라도,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기득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외면한다. 먼 훗날 언젠가 폭발하게 될 분노와 저항은 기다릴지 몰라도, 지금 당장 싹을 틔우는 분노와 저항은 잘라버린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청년에게 '분노하고 저항하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기만'이요, '유체이탈 화법'이다. 

생각해 보자. 1980년대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김대중·김영삼이라는 거물이 없었다면, 학생들을 숨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던 종교·시민단체가 없었다면, 남몰래 응원하다가 이때다 싶으면 거리로 뛰쳐나왔던 수많은 넥타이 부대들이 없었다면, 그러니까 곧 함께 변화를 갈망하고 행동에 동참했던 '기성세대'가 없었다면, 그 시절 그 젊은이들이 그토록 폭발적인 에너지를 모을 수 있었을까? 


좋아, 분노하고 저항할게... 그런데 당신은?


청년들은 이미 조금씩 분노하고 저항하고 있다. 일단 '말'을 점령했다는 게 고무적이다. '88만원 세대', '삼포세대', '달관세대'는 기성세대가 만든 말이었지만, '헬조선', '지옥불반도', '금수저·흙수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은 청년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젊은이들은 스스로 세상을 정의하고 그 해석이 온 사회에 통용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 <내부자들>의 조국일보 이강희 논설위원이 말한 대로 "말은 곧 힘이고 권력이다." 청년들이 작게나마 힘과 권력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서의 작은 승리와 성공의 경험이다. 이는 기성세대가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요구를 수용할 때 가능해진다.

"이른바 '자기 효능감'을 느껴야만 청년들이 적극적인 참여에 뛰어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자기 효능감은 개인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의 수준인데, 자기 효능감이 높은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그것을 피해야 하는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복해야 할 흥미로운 도전으로 여긴다. 이 개념에서 비롯된 '정치 효능감', 즉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면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청년들에게 주기 위해선 작은 승리나 성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114~115쪽)

'줄탁동시(啐啄同時)'란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해 껍질 안에서 쪼면, 어미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알을 깨기 위해선 '안과 밖'에서 함께 쪼아야 한다. 변화를 위한 오늘날의 과제는 민주화에 전력한 과거보다 더욱 다양하고 섬세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일상과 현장에서 더 많은 연대와 협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다. 

청년들에게 '분노하고 저항하라'라고 말하려면, 기성세대 역시 그들과 함께 알을 깨뜨릴 마음가짐이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 분노와 저항의 대상이 자신이 된다 할지라도. 그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느낄 때, 즉 변화에 대한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질 때 비로소 청년들은 '거대한 전환'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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