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아주머니
작년 9월
저녁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혜화동 로터리에서 큰 지도를 펼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짓하는 외국여자가 보였다. 내 앞에 남녀커플이 있었는데 지나쳐갔고 뒤이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한창 영어공부 중이라 몇 가지는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호기롭게 나섰다.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창덕궁이었고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다. 버스나 택시를 이용할 수 있고 걸어서는 20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60대 정도 보이는 중년 여성이어서 혼자 보낼 수가 없었다. 저녁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나는 같이 가자고 '팔로우미' 라고 말했고 그 여성은 '땡큐땡큐'하며 가방과 지도를 서둘러 챙겨 내 뒤를 따라나섰다.
흠.. 그런데 큰일이다. 막상 같이 걸으니 20분 동안 잘 대화할 수 있을지 괜히 긴장이 되었다. 뭐라도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아 이 주변으로 궁이 여러개 있고 지금가는 이길은 창경궁 길이고 그 다음이 창덕궁이다. 창경궁 방향은 이쪽이고 이 길은 내가 매일 밤 산책하거나 뛰면서 운동하는 길이다. 인적이 드물고 어둡지만 매우 안전하다 등의 이야기를 하다가 둘 다 아무말이 없는 조용한 순간들도 있었다.
한국어와 독일어가 모국어인 우리, 그럼에도 서로를 배려하며 영어로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 여성의 이름은 릴리, 엘리자베스 무엇 무엇이었는데 '릴리'로 부르라고 했다. 학교에서 미술선생님이었는데 은퇴를 했고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오스트리아에 갤러리가 있다. 한국 수묵화의 매력에 빠져서 한 달간 배웠고 얼마 전 수묵화 전시도 했다며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오늘이 한국에서 마지막 밤이고 내일 오스트리아로 떠난다고 했다. 나도 이름을 알려주었고 릴리는 그 이후로 나를 '수'라고 불렀다.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익숙하게 발음되는 것이라 아니라 나는 자꾸만 오스트레일리아 (호주)라고 말이 나왔다. 릴리는 "노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리아!" 라고 정정해 주며 "오스트리아, 노 코알라 노 캥거루" 하며 웃기기도 했다. 릴리는 같이 걸어주는 내가 고마웠던지 맥주나 커피 한잔을 꼭 하자고 했다. 내가 못 알아들을까봐 번역기를 이용해 한국어로도 말해주었다. 나는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릴리가 무엇이든 마실 것을 꼭 한잔 사고 싶다고 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자고 했고 릴리가 좋아할 만한 창덕궁 근처 커피숍을 검색하며 걸었다.
창덕궁에 도착하긴 했는데 릴리와 나는 어쩌지를 못하고 괜히 기념사진만 찍었다. 릴리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으니 그제야 주소를 알려주었다. 북촌 한옥마을 숙소이다. 우리는 20분 걸어왔는데 또 20분을 넘게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바람이 불어 추운데 겉옷이 얇은 릴리가 걱정 되어 택시를 잡아 탔다. 헌법재판소를 지나는데 제동초등학교 사거리 길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을 알고 있다며 릴리가 내리자고 했다. 릴리가 현금을 꺼내려는데 내가 카드로 먼저 계산했다. 릴리는 깜짝 놀라고 당황했지만 택시에 내려 연신 고맙다며 아주 맛있는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라 마감하는 카페가 많았는데 다행히 늦게까지 영업하는 카페가 있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아이스라떼를 주문했고 릴리도 같이 아이스라떼를 주문했다. 유럽사람들은 커피를 따뜻하게 마신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나를 따라 덩달아 주문한 것 같았다. 나는 안국동에서 중고등학교시절을 모두 보냈고 제동초등학교 사거리는 내가 매일 교복을 입고 지나다녔던 곳이다. 북촌으로 관광지가 되어 많은 상점들로 예전 모습 같지 않았지만 이곳에 릴리와 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한다는 게 신기했다.
릴리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동안 작업한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미술에 조예가 있었더라면 좋았겠다,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글자와 색이 섞여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작품, 붓으로 그린 간단한 그림 주변에 여러 색이 번져서 몽환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뭔가 엄청 멋있었는데 굿, 뷰티풀 등의 간단한 반응밖에 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릴리는 그래도 그림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여러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내게 그림 선물도 하고 싶다고 다음에 만날때 꼭 전해주고 싶다고도 했다.
많은 대화들이 마무리되어갈 때쯤 한국에서 마지막 밤인데 '수'와 같이 친절한 한국 사람을 만나 한국에서의 기억이 좋게 남을 것 같다. 고맙다, 헤어지니 아쉽다 등의 말들을 하며 그 밤 우리는 서로 안고 헤어졌다.
릴리는 내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었고 우리는 디엠으로 그날의 사진과 마음들을 나누었다. 잘 도착했다, 고맙다. 내년 9월에 한국에 또 오는데 그때 만나자.
벌써 6개월이 지난 일인데 릴리는 아직도 디엠으로 내게 매주 사진을 보내온다. 그리고 나의 행복한 주말과 행복한 일주일을 위해 늘 빌어준다. 나도 덩달아 한국의 사진과 릴리의 안부를 매주 묻고 있다. 릴리는 작업차 여러 곳을 다니는 모양이다. 모로코 사막 사진과 그림 작업한 것들도 보내주었다. 릴리 덕분에 나도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딱 한번 만났고,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데 릴리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작년 9월 처음 만났을 때 릴리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나를 따라나서며 씩씩하게 걷는 모습과 서로 바라보며 계속 웃으며 잘 되지 않는 영어로 최선을 다해서 소통했던 릴리의 표정, 고마워하는 마음을 한껏 담은 릴리의 환한 웃음 등. 9월에 한국에 오는 릴리를 위해 더 열심히 영어공부 중이다. 남편은 자동차도 샀으니 릴리 아주머니 모시고 서울 여기저기 구경 시켜주자고 이야기도 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다. 릴리를 만나면, 보자마자 꼭 안아줘야지!!
* 4월에 회사에서 연수가 있다. 유럽으로 가는데 지금까지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로 갔으니 이번에도 그러겠지 했는데 오스트리아와 체코로 간다고 한다!! 어쩌면, 릴리를 만나고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