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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브릴 Jul 22. 2019

일탈 / 지구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나면 좋겠어

세계일주 에세이 | 프랑스 파리 01







:: 1 ::


"밀라노 지나서 파리로 간다고? 좋은 일정이네, 파리는 정말 굉장하거든. 난 볼로냐랑 베네치아를 거쳐서 독일로 돌아갈거야."


몇 번이나 들었지만 이름을 또 잊어버렸는데, 일단 여기서는 '샤오'라고 부르겠다. 샤오는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학에서 재학 중인 중국인 남자였다.


피렌체 호스텔 4인실에서 지낸 셋째 날인가 넷째 날 밤, 방에 베드 두 개가 비어서 샤오와 둘이 머물고 있었다. 대화가 잘 돼서 새벽 네 시까지 한 여섯 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는 아주 좋았다. 도대체 이런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강의 시간에 다루는 예술 영화부터 역사, 언어, 바흐 음악, 종교, 성, 국제 정세, 유럽인 뒷담 등등. 한국에선 도통 대화하기 난처해지는 화제라 신나서 열심히 떠들었다. 사실 어떤 이야기든 결국은 삶에 관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왜 이런 대화를 일상적으로 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걸까?


출처: 영화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아무튼 이 글의 주제는 일탈이니, 여기서는 샤오와 나누었던 대화 중 대마 얘기를 좀 풀어놓겠다:


“그건 드러그(drug)가 아냐. 내가 알기로 드러그는 화학적으로 제조된 거야. 그건 그냥 ‘위드*’라고 해.”

*위드(weed): 풀, 잡초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대마초를 뜻하는 아주 일반적인 속어이기도 하다.


그 때 어쩌다 얘기가 여기로 흘러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샤오 말로는 독일 대학생들이 위드를 하는 일이 아주 흔하다고 했다.


"그냥 파티를 하면 어디선가 위드가 나와. 그럼 다들 피는 거지."


“독일에서?”


“응.”


“대학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샤오가 내 강한 반응에 좀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급기야는 좀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 되었는데, 그 이유인 즉슨,


“나는 독일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규칙을 중시하는 줄 알았는데?”


내 반응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샤오는 독일의 합리성과 체계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거기서 대학에 다니는 것을 나름대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으니까.


출처: 영화 <기숙학교: 금지된 일탈>


이 얘기는
위드가 그 자체로 좋은 게 아니라
단순히 일탈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규칙을 어길 때의 쾌감'.


그래도 궁금하긴 해서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샤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 느낌도 안 나."


어찌나 허탈하고 어이없던지. 어쩌다 기회가 생겨 몇 번 피워봤다는 한 한국인의 얘기로는 '매번 담배 처음 필 때의 느낌이 난다'고 했는데.


"그게 좀 일상적인 게 되면 담배처럼 그냥 그저 그런 게 되는 거야? 이해가 안 가네. 아무 느낌도 안 나면 그걸 뭐하러 피워?"


기분마저 딱히 좋을 게 없다면 더더욱 합리적이지 않다. 황당해하는 내 표정에 샤오는 다시 수줍어하면서 말했다.


"그냥, 그냥 하는 거야. 심심하고 별로 할 것도 없으니까. 꼭 누군가는 위드를 꺼내. 그러면 다들 피우니까 이 사람 저 사람 자연스럽게 같이들 피게 되는 거지."


이 얘기는 위드가 그 자체로 좋은 게 아니라 단순히 일탈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규칙을 어길 때의 쾌감'.


"청소년, 완전 청소년이네."


여전히 민망해하는 샤오를 두고 나는 몇 번이고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다.




:: 2 ::



친구에게,


파리엔 어제 도착했어. 소식 들었어?

파리에 도착하고선 내내 심리적으로 압박을 많이 받고 있어.


첫 번째 이유는 도착했던 날 브뤼셀 테러가 있었기 때문이야. 물론 프랑스 사람들이 날 압박하는 건 전혀 없어. 난 그냥 딱 보기에도 동양 사람이고, (프랑스는 좀 예왼 것 같지만) 서양인 기준으로는 쁘띠 바디를 가진 여자이고, 동글 동글하게 생겼고, 눈은 좀 선해보이고, 한 23살 정도로 보인다고 하니 그냥 학생인 줄 알겠지. 이탈리아랑 마찬가지로 다들 날 그냥 여자애로 봐.


이전 파리 분위기를 잘 몰라서 요즘 어떤 지 비교해서 설명하긴 어려운데 특별히 심각한 분위기가 느껴지지는 않아. 그렇지만 지금 지내고 있는 에어비앤비* 집주인이 이래라 저래라 얘기해주는 걸 보면, 그래도 프랑스 인들 사이에서 좀 조심하는 게 있는 것 같아. 한 군데서 기웃거리거나 열쇠 익숙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거 좀 신경쓰더라고. 심지어는 유심 카드도 사지 말라고 했어.

*에어비앤비(Airbnb): 공유 경제의 일종인 숙박 서비스 이름. 집에 남는 방 등을 여행자나 방문자에게 유료로 제공하는 서비스이다. 해외의 일반 가정 집에 머물며 문화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 파리와 같이 숙박 요금이 비싼 지역의 경우 에어비앤비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1인실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파리 테러가 난 지 오래 지나지 않았고, 특히 바로 어제 브뤼셀에 테러가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거야. 그렇지만 특별히 날 의심스럽게 보거나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오히려 내가 외국인이라서 스스로 마음이 좀 불편한 것 같아. 유럽엔 테러가 났는데 관광객 여자애가 놀러다니고 있잖아. 어젠 정말 길에서 미소 한 번 짓기도 어려웠어.


브뤼셀 테러로 에펠탑 조명이 빨강-노랑-검정으로 점등되어 있다.


그리고 둘째는 역시 언어. 이탈리아 처음 갔을 때 봉쥬르* 때문에 부온 쥬르노*가 잘 안 됐던 것처럼, 지금은 거꾸로 봉쥬르가 안 돼. 봉, 하려고 입술을 내밀면 자동으로 입술이 아래로 살짝 내려가면서 부온 쥬르노가 된다니까. 씨*는 대책도 안 서, 그라치에*도 계속 튀어 나오고. 얼마나 민망한데, 내가 그렇다고 이탈리아어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 이태리어 영어 한국어가 완전히 짬뽕이 됐고, 불어는 심지어 메르시*도 생각이 안 날 정도야.

*봉쥬르(Bonjour): 프랑스어 아침 인사

*부온 쥬르노(Buon journo): 이탈리아어 아침 인사

*씨(Sì): '네'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그라치에(Grazie): '감사합니다'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메르시(Merci): '감사합니다'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프랑스인들의 언어 자존심에 대해서 워낙 들은 얘기가 많다보니, 왠지 영어를 쓰면 안 될 것 같은 압박이 있어서, 아는 단어나 불어 단어는 모두 불어/불어 발음으로 말하려고 애는 쓰고 있는데, 못하니까, 또 이거 땜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물론 불어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못되게 구는 사람은 전혀 없었어. 사실 난 아시안이라 대놓고 외국인이라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면 다들 미소지으면서 먼저 영어로 얘기하거든.


프랑스에서 다짜고짜 영어로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이해 못하는 거 아냐, 이해하고 또 존중해. 그게 콧대 높은 거라고 전혀 생각 안 해. 뭐랄까, 한국에서 당연하다는 듯 다짜고짜 일본어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웃긴다고 생각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일지도. 그래도 최소한 불어를 쓰고자 노력한다는 건 보여주는 게 내 도리라고 생각하는 거고, 이게 또 스스로 스트레스인 거지.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피렌체 컴플렉스*. 왜 내가 마지막에 밀라노에서 만난 피렌체의 얼굴 때문에 좀 울었다고 했잖아. 이걸 끝으로 나 결국 엄청 소심해져 있어.
*'피렌체 컴플렉스'로 대변되는 이야기는 이탈리아 피렌체 2화 <피렌체의 얼굴들, 그러나 까페>를 확인해주세요. 카페 질리(Caffè Gilli) 이야기도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Gilli에서 하도 납득이 안 돼서 웨이터한테 내가 뭐 실수했냐고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옆에 있던 웨이트리스 여자가 눈을 구슬같이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하늘 높이 올리고 고개를 저으면서 no no no no no no 말하더라고. 그 남자 웨이터가 자기가 오늘 너무 바빴다고 미안하다고 보통 안 이런다고 사과했었어.


그런데 밀라노 카운터에 있던 여자는 내가 음식 포장되냐고 물었더니, ‘You do what?’ 이라고 물었는데, 말투와 얼굴 표정이, 이게 미쳤나, 무슨 개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였거든. 뭐라고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잘 못’ 들었거나 ‘잘못’ 들었거나 둘 중에 하나는 분명해. 다시 말했을 때 어쩌고 저쩌고 다시 설명해줬거든. 좀 계면쩍어하는 빛도 보였고. 그렇지만 난 마치 ‘음식을 (공짜로) 조금 가져가겠소’, 라고 말한 노숙자가 된 기분이었어. 그 표정이랑 말투가 너무 강렬했고, 계속 눈 앞에 나타나더라고. 그래서 울었어.


내가 잘 맘 상하고 그런 사람은 아닌데, 피렌체에서 시달렸던 게 한 번에 왔던 거 같아. 그러고 나서 프랑스에 도착해서 보니 결국 이렇게 특급 소심쟁이가 됐더라고. 무슨 행동도 하기가 힘들고, 이탈리아에서 보였던 자신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졌어.





파리에 온 이래로 하루에 한 번,
스타벅스에 가고 있어.
(⋯) 뭐랄까, 여기에서 만큼은
프랑스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 거지.


파리에 온 이래로 하루에 한 번, 스타벅스에 가고 있어.


사실 이탈리아에서 였다면(이탈리아엔 별다방이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심지어 피렌체였을지라도 이런 건 절대 안 했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이탈리아 커피는 정말 싸기도 한데, 정말 맛있어. 파리에 온 뒤로, 맥앤치즈를 먹어보고는 ‘이건 치즈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 프랑스 사람처럼 굴고 있어. 나도 웃기는 거 아는데, 커피가 정말 맛이 없어.


정확히 얘기하면 스타벅스조차도 미국/한국/일본에서 파는 거랑 맛이 달라. 대체 누가 전세계 어디든 똑같다고 했어? 그게, 이탈리아에서 카푸치노를 시키면 맛은 있는데, 한국이나 미국 카푸치노 농도가 아니라 한국이나 미국에서 파는 카페 라떼만큼 맛이 엷어. 그래서 이탈리아에선 끝까지 카페 라떼는 안 마셔봤지. 그런데 프랑스 와서 시켜보니까 너무 묽더라고. 왜 원래 카페 라떼 시키면 에스프레소를 큰 잔으로 뽑잖아, 그거 말고 작은 잔 하나 넣은 맛이야. 오늘 에스프레소 샷 추가해서 주문하니까 겨우 한국/미국/일본에서 마시던 카페 라떼 수준의 농도가 나왔어.


그리고 프랑스는 카페 라떼고 카페 오레고 우유도 맛이 달라. 생우유말고, 분말 우유나 멸균 우유에서 나는 맛이 나, 진짜 돌아버리겠어, 이게 우유 풍미가 떨어지거든.


애초에 처음 스타벅스 들어갔던 거 자체가 프랑스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 두 잔을 연속 실패해서 그런 거였는데……. 아니면 내가 그냥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별다방 맛을 잊었나?


파리의 한 스타벅스. 세계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스타벅스를 자주 찾았다. 원본 출처: 위키피디아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어차피 프랑스 커피는 맛이 없고 나는 커피가 필요하므로, 어쨌든 카페인은 마셔야겠고 홍차는 그닥 안 땡기므로, 하루에 한 번 씩 스타벅스에 가고 있어.


왜 스타벅스냐 하면, 여기가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 거야. 단순히 내가 잘 아는 것도 있고, 미국 브랜드 특유의 자유로운 느낌 때문인 것도 있지만, 뭐랄까, 여기에서만큼은 프랑스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 거지. 위에서 얘기했던 저 모든 압박감에서 몽땅 자유로워지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하루에 한 번, 프랑스에서 일탈 행위를 하고 있어. 스스로 압박을 느끼는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주는 거지.


출처: 영화 <기숙학교: 금지된 일탈>


여행 자체가 일탈이 아니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지금 하고 있는 여행은, 남들이 하는 것만큼 즐겁진 않을 거야. 왜냐하면 이건 휴가를 받아서 떠난 일탈이 아니라, 나의 새로운 일상이거든. 벗어난 느낌도 없고 시간의 압박도 많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겪는 행복의 격앙도 거의 없어. 풍경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인지해야 하는 아주 긴 산책길 같은 거지.


나한테 이건 삶에 부여한 과제였고, '살아가는동안 할 일' 가운데 하나야. 이건 큰 결단력과 용기, 자제심과 행동력, 의지가 필요한 거야. 이것을 내가 기꺼이 수행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지켜보는 것이 기쁨의 요인이지. 난 그냥 이걸 '이탈'이라고 이야기해.


그래서 고작 스타벅스같은 게 프랑스에서 나의 일탈이 된 거고, 그리고 또 그 밖에 무슨 일이 벌어졌으면, 하고 기대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욕망하고 있는 거야, 프랑스인처럼 말하자면 말야. 서른 한 살에 다시 한 번 스물 한 살을 맞이하기를, 이 여행이 다시 한 번 내 영혼의 색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를, 기적이 일어나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를. 그렇게 기대하면서 종일 길을 걷는 거야, 지구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나면 좋구요, 하면서.



2016. 3. 24

애브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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