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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브릴 Aug 05. 2019

INFP의 세계

세계일주 에세이 | 프랑스 파리 02







:: 1 ::


"애브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왜 집 안에 있는 거예요? 날씨가 좋으면 바깥에, 나쁘면 뮤지엄을 가거나 실내 활동을 하라고 제가 얘기했잖아요?"


체크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에어비앤비* 주인이 쿵쿵쿵 방문을 노크하면서 오지랖을 떨었다.

*에어비앤비(Airbnb): 공유 경제의 일종인 숙박 서비스 이름. 집에 남는 방 등을 여행자나 방문자에게 유료로 제공하는 서비스이다. 해외의 일반 가정 집에 머물며 문화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 파리와 같이 숙박 요금이 비싼 지역의 경우 에어비앤비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1인실을 사용할 수 있다.


'무슨 참견이지? 서구인이 이렇게 개인 행동에 이래라 저래라 하나?'


방금 만난 사이인데 산다(Sanda)는 이미 잔소리하는 엄마처럼 굴고 있었고, 날 파리 견학온 어린애 대하는 듯한 것이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딸이 이미 대학을 졸업했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출산을 좀 일찍했는지 산다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할머니도 아닌데 오지랖 떠는 도시 여자라니.


물론 산다도 이미 내 나이를 안다. 프랑스 나이로도 스물 아홉이면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나이가 아니지 않나? 내심 아파트 밖으로 날 쫓아내고 편히 있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서 파리를 느껴보라는 건가.


몹시 우중충한 파리의 아침 날씨. 센 강 뒤편으로 보이는 것은 프랑스 국립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이다.


"오늘 날씨가 나쁜데요?"


우중충한 아침 하늘을 내다보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피곤한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은 것도 있었다. 밀라노에서는 숙박을 하지 않고 환승 시간 12시간을 두고 기차를 갈아탔다*. 그러니까 피렌체를 출발, 밀라노에서 12시간 내내 돌아다니다가 밤 기차로 리옹역(Gare de Lyon)에 도착한 것. 그러고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걸어다닌다'는 철칙 하에 캐리어를 끌고 강을 건너 여기까지 왔단 말이다.

*연결되는 기차표를 예매하지 않고 피렌체~밀라노 구간, 밀라노~파리 구간 기차표 두 개를 따로 샀다. 가격은 동일하다.


날씨가 나쁘다는 내 말에 왜인지 산다의 얼굴에 조금 한심하다는 듯한 기색이 비쳤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 거예요. 파리는 흐리고 비가 굉장히 자주 와요, 런던이랑 비슷하다고요."




:: 2 ::



눈치보는 성격 때문인지 돈을 내고 투숙하는데도 남에 집에 신세진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내가 피곤해서 축 쳐져 있는 날마다 산다는 반복해서 나를 밖으로 내보냈고, 내가 저녁 늦게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는 흡족해하는 듯했다. 정말이지 기숙사 사감같지만 그녀는 영화계에 종사하는 예술가였다.


아직 파리는 몹시 스산해서 기온이 12도 남짓했다. 그럭저럭 최고 기온이 20도까지 오르기도 하던 이탈리아에서도 춥다고 생각했는데 파리에서는 몸이 조금씩 안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셔츠 두 장, 기모 티셔츠, 트렌치 코트까지 껴입고 다녔지만 일조량과 기온에 예민한 몸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열심히 걸어서 체온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날 파리에 도착해서 파리 한 바퀴를 행군하다시피 한 정도. 프랑스 국립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근처의 에어비앤비에서 출발, 몽마르트 언덕(Montmartre)으로, 에펠탑(Tour Eiffel)으로, 그러고 나서 다시 에어비앤비까지 걸어서 움직였다. 서울로 치자면 코엑스에서 경복궁, 영등포, 다시 코엑스로 하루 만에 걸은 셈. 몽마르트 언덕을 오를 때 몸이 많이 뜨거워졌다는 점도 덧붙이겠다.



하지만 산다가 아니어도 매일 아침 착실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출발 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 고작 두 번째 나라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아까운지.


힘들 때마다 소설 <마션>*의 글귀가 생각난다. '죽도록 긴 여행을 다니기로' 결심한 것은 나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에 남은 젊음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기로 결정한 것은.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어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킨 공상과학소설. 화성에서 조난당한 우주비행사가 지구로 살아돌아오는 과정을 다뤘다.




:: 3 ::



INFP

잔다르크형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내향(Introversion), 직관(iNtuition), 감정(Feeling), 인식(Perception)


정열적이고 충실하며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며 내적 신념이 깊다. 마음이 따뜻하고 조용하며 자신이 관계하는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다. 이해심이 많고 관대하며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에 대하여 정열적인 신념을 가졌으며, 남을 지배하거나 좋은 인상을 주고자하는 경향이 거의 없다. 완벽주의적 경향이 있으며, 노동의 대가를 넘어서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찾고자하는 경향이 있고, 인간 이해와 인간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기를 원한다. 자신의 이상과 현실이 안고 있는 실제 상황을 고려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출처: 영화 <잔다르크>


프랑스에 가기까지, 이 나라에 대해서 '그나마'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딱 세 가지 뿐이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생텍쥐페리(Saint Exupery)의 <어린왕자(Le Petit Prince)>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의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

국적 불분명한 아이템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영화 <아무르(Amour)>

정도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영화 감독 미하엘 하네케(Michael Haneke)의 국적 애매한 프랑스 영화.


<미녀와 야수>의 벨도 프랑스인이었다! 원본 출처: sincerelyintroverted


그러니까 프랑스 여행의 테마가 'INFP의 세계'가 된 데는 별달리 큰 이유가 없다. 이것 말고는 주제삼을 수 있을 정도로 관심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프랑스를 갈까 말까 몇 날 며칠을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유럽에 왔으니 파리에는 한 번 가보자.”


프랑스에는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왔다. 원체 관심이 없었던 터라 무엇을 주제 삼고 무엇을 볼 지 고민이 많았고, 오래 전 '찌라시'처럼 돌던 거짓 정보가 기억났다.


"프랑스는 MBTI 성격 유형 중에서 INFP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프랑스는 MBTI 성격 유형 중에서 INFP에게 가장 잘 맞는 나라이다."


물론 지금 검색해보면 이런 결과는 찾아볼 수도 없다. 하지만 10여 년 전 내가 처음으로 MBTI 약식 검사를 했을 때에는 이런 '찌라시'가 꽤나 많이 돌았다. MBTI를 좋아하며 낭만주의자로 정평난 INFP들이 만들어낸 정보일지도 모른다. 늘 나는 프랑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여부는 무시하기로 했다. 어쨌든 INFP는 '잔다르크형 성격유형'이고, 잔다르크는 프랑스 오를레앙 사람이었으니까. INFP의 특징을 보면 프랑스적 가치와 합치되는 게 많은 듯 보이니까. 또 이 세계일주의 목적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둘러보는 것'이니까.




:: 4 ::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여주인공 셀린은 프랑스인이었다! 원본 출처: 영화 <비포 선셋>


인권 운동 열심히 하는 나라.
자유 혁명을 일으킨 나라.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를
부르짖는 나라.


친구에게,


내가 INFP라고 너한테도 얘기한 적이 있었나? 기억이 잘 안 나네.


INFP는 MBTI 성격 유형 가운데 하나야. 여기 소수 성격 유형이 꽤 여럿 있는데, INFP도 그 중에 하나고. 비율이야 자주 바뀌겠지만, 우리나라에는 한 3%, 전 세계적으로는 한 1% 정도 있다고 들었어. 보통 '이상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데, 실제로도 현실 세계에서 많은 괴리감을 겪고 잘 적응을 못한대.


나만 봐도 그렇지, 뭐. 너도 아다시피 몽상가고, 난 잘 모르겠지만 다들 '나만의 세계'가 있다고 하고, 사회 적응이 참 어려워.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런 INFP가 최고 비율을 차지한다고 하는 나라들이 좀 있어. 그리고 프랑스가 대표적이래. INFP 자체에도 '잔다르크형 성격 유형'이라는 프랑스인 꼬리표가 붙어 있고. '이상을 위해 목숨도 바치는 사람들'이라면서.


그래서 궁금했어. 난 국가별로 성격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럽에 좀 오래 있다 온 사람들도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


"어어, 아니에요. 프랑스인들은 좀 달라요."


인권 운동 열심히 하는 나라. 자유 혁명을 일으킨 나라.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를 부르짖는 나라. INFP가 다수를 이루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곳으로 가면 나는 '보통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늘 루브르 박물관에 다녀왔어. 프랑스인들과 프랑스적인 삶을 보려고 여길 온 건데, '당연히 뮤지엄에 가야'하는 내 신세를 탓하면서. 루브르는 정말 멘붕 오게 크더라, 관이 3개 있는데, 오늘은 그 중에 '드농'관이라는 곳만 다녀왔어.


드농관은 대부분이 이탈리아, 이슬람 작품이었고, 그 밖에 로마, 로마 식민지, 영국, 스페인, 북유럽 등 작품이 있었어. 도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건가, 계속 혼란스러웠어. 그나마 프랑스를 좀 이해하길 바랐는데 아예 헛물만 켜고 있는 것 같더라고.


프랑스의 얼굴들


그래도 끝까지 열심히 봤어. 그리고 드농관 마지막 3개 전시실의 프랑스 작품들을 만났지. 거기서 프랑스의 얼굴들을 만났어.


미술이 확실히 힘이 있기는 한가봐. 그들의 삶과 역사, 생각을 이해하게 되더라고. 에로스와 프시케*, 미소지으며 끌어안고 있는 엄마와 딸*,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파리스와 헬레네*. 이들을 보면서 내내 프랑스가 '사랑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어.

*프랑수아 시몽 제라르, <프시케와 에로스>, 루브르 박물관, 1798

Francois Pascal Simon Gérard baron, Psyche and Amor, AKA Psyche Receiving Cupid's First Kiss, Musée du Louvre, 1798

장 드 라퐁텐이 1669년에 쓴 희곡 <프시케와 에로스의 사랑이야기>에 나오는 장면. 부주의한 호기심으로 아프로디테의 마지막 시험에서 죽음과 같이 잠에 빠진 프시케는, 에로스의 입맞춤을 받고 다시 살아난다.

*엘리자베스 루이 비제 르 브룅, <마담 비제 르 브룅과 그녀의 딸>, 루브르 박물관, 1798

Elisabeth Louise Vigée-Lebrun, Madame Vigée-Lebrun et sa fille, Musée du Louvre, 1789

*안 루이 지로데 드 루시 트리오송(지로데 트리오종),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루브르 박물관, 1819

Anne-Louis Girodet de Roussy-Trioson, Pygmalion and Galatea, Musée du Louvre, 1819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설화.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 갈라테이아에게 반해 아프로디테에게 조각이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빈다. 아프로디테가 소원을 들어주어 조각은 사람이 되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파리스와 헬레네, 루브르 박물관, 1788

Jacques-Louis David, The Loves of Paris and Helen, Musée du Louvre, 1788

아프로디테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황금 사과를 받은 대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인 헬레네를 아내로 맞게 해준다. 파리스는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달아나며, 이 일이 불씨가 되어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다.


프랑스 작품들은, 심지어 루브르에서 수집한 해외 작품들마저도 본국 작품들에 비해 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어. 얼굴은 동그랗고 살결은 보들보들한 느낌을 주면서 화색이 돌아. 평화로운 가운데 삶과 타인을 사랑하는 얼굴을 하고 있어. 정말로 ‘파리스’ 신화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여.



테러 직후에도 흔들리지 않고
프랑스적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그 완고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들이 보는 이중적인 정경이 떠올라. 명과 암을 강렬하게 채색하는 그 빛의 화가들이 나타낸 모습들처럼 말야.


브뤼셀 테러 바로 다음 날, 파리의 거리는 마치 어린 시절 보았던 토요일 오후 같았어. 이전에 이 도시는 얼마나 평화롭고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을까.


눈이 마주치면 수줍은 듯 슬며시 미소지으며 아이 컨택을 흘려 회피하는 사람들.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카페에서의 끝없이 대화하는 사람들, 부드러운 얼굴 표정과 미소,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라면 열정을 쏟아내는 눈빛들.


도대체 이들 어디에서 오만하다는 평이 튀어나오는 걸까. 도대체 이들 어디에서 그렇게나 자주 파업할 힘이 나올까. 도대체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일까. 테러 직후에도 흔들리지 않고 프랑스적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그 완고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출처: Eugène Delacroix, Liberty Leading the People, Louvre Museum, 1830


꿈과 이상을 향해 움직이고,
또 그것을 수호하는 것이
프랑스의 정체성이고 힘이었던 거야.
(⋯) 내가 믿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
여기가 INFP의 세계.


드농관의 프랑스 작품들을 보면서, 곧 그 말이 계속 떠오르기 시작했어.


“그대 마음에 선한 이상을 수호하라.”


이게 아마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던 말이지?


몽테뉴 버전은 좀더 확실한 것 같아.


"자신에게 부끄러움과 존경을 느낄 때까지 '그대 마음에 선한 이상을 수호하라.'"


그러고 나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마주하는 순간, 이 그림이 이 왜 위대한 작품인지 알게 됐어. 흰 얼굴과 목덜미, 팔과 가슴을 내놓은 여자가 하나가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깃발을 높이 손에 들고 사람들 앞에 서 있었지. 잔 다르크의 기적처럼, 꿈과 이상을 향해 움직이고, 또 그것을 수호하는 것이 프랑스의 정체성이고 힘이었던 거야. 그게 INFP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실제이고, 프랑스는 그 이상을 정체성으로 삼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었던 거지.


철학도 역사도 문학도 예술 작품들도, 아주 오랫동안 이상의 수호를 위해 희생을 치러온 사람들이 여기에 있었어. 내가 믿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 여기가 INFP의 세계.


(2016. 3. 25)

애브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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