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에세이 | 바티칸 & 이탈리아 로마 01
세계일주 출발 약 한 달 전, 이미 퇴사 후였는데 4중 추돌 교통사고가 났다. 사거리에 자가용 세 대가 신호 정지해 있었고, 네 번째 차가 직진해서 세 번째 차를 들이받았다. 어찌나 세게 들이받았는지 세 번째 차량은 트렁크부터 뒷좌석까지 아코디언처럼 찌그러졌고, 두 번째 차를 거쳐 첫 번째 차까지 연쇄로 부딪혔다. 나는 두 번째 차량에 뒷자석에 앉아있었다.
조금 아팠을 뿐 다른 이상은 없었다. 여행이 다 뭔가, 세 번째 차량이 없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다쳤을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무일푼에.
하지만 이게 정말로 다행한 일인 것인지 의문도 들었다. 이대로 여행을 나가서 계속 걷고 움직이다 보면 다시 아플 지도 모를 일 아닌가. 도대체 행운인지 불길함의 전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 신이 나를 지켜준 것이라면, 교통사고에서 나를 살려낸 것일까, 아니면 여행의 위험을 미리 알린 것일까?
교통 사고는 생각해봐야 의미없는 일이었고, 어쨌든 여행은 출발했다. 그러나 문제는 인천 공항에서 또다시 발생했다. 내가 로마에서 돌아오는 항공권을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로마행 출국 티켓 뿐이었다.
여행 초심자의 순진함인가, 첫 출국을 준비하는 몇 개월 내내, 한국에서 출국이 불가능하다든가 이탈리아에서 입국이 불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살러 가세요?"
항공권을 발급하려는데 직원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몹시 머쓱했지만 지금 세계일주를 떠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나라로 육로 이동할 것이며, 당분간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다고. 항공사 직원은 내 얘기를 들으며 이것 저것 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탈리아로 가는 건 무비자 입국이 맞습니다. 대신 편도 항공으로는 입국이 거절될 수 있어요."
그녀는 애써 짜증을 억누른 무표정한 얼굴로 날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추가적인 서류 처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대상 국가 입국 거절 시 해당 비행사에 책임이 없다는 '각서'가 필요하단다.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녀가 내민 서류에 서명을 했다.
발권, 탑승, 비행, 환승, 비행, 또 환승, 또 비행. 스무 시간이 넘도록 걱정과 고민에 시달렸다. 와이파이 연결이 되기만 하면 네이버를 뒤적거려 편도 입국에 관해 검색해보았다. 검색 결과는 거의 없었다, 해외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모험'을 감행한 사람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네이버 지식iN에서 간신히 몇 가지 답변을 찾았는데, 대체로 불리할 것이라는 '의견'들 뿐이었다.
걱정에 가득차서 로마 공항에 도착했다.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다시 편도 입국 정보를 뒤적거렸다. 환승은 두 번 다 중국에서 했는데, 공항에서 와이파이를 쓸 수 없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스마트폰만 쳐다보면서 느릿느릿 입국 심사대로 걸어갔다. 줄서 화장실도 다녀왔다.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이렇다 할 검색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미적거리며 입국 심사줄에 섰다. 같은 비행기를 탄 사람들은 이미 거의 다 빠져나가고, 다음 비행기의 중국인 관광객 무리 사이에 섞여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이라도 100% 환불 가능한 티켓을 사야할 것인가. 항공권을 검색하면서 단톡방에서 친구들과 이 문제에 관해 떠들었다. 물론 이건 그저 '얘는 걱정스럽게 시작하자마자 모험 중계'에 불과했다. 아무도 답을 줄 수 없었으니까.
그러는 동안 심사줄은 점점 줄어들었고, 적당한 항공권 하나를 찾아냈다. 급한 마음을 달래면서 차근차근 입력하고 나니 통신사 핸드폰 인증을 하라고 했다. 몹시 답답한 심정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생각했지만 도대체 귀국 항공권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출국 티켓이 있어야 입국이 가능하다'는 말은 트집잡기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왕복 항공권으로는 티켓 소지자의 불법 체류 여부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라면 불법 체류자나 테러범이야말로 더더욱 출국 티켓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제 내 앞에 두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이젠 티켓을 사기에도 너무 늦었다.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여행자가 이렇게 많은 나라인데 더러 나 같은 사람이 없을 리 없다.
나를 웃게 만든 친구의 카톡을 생각하면서 즐거운 얼굴로 심사대에 올랐다.
"부온 쥬르노(Buon giorno)*."
*부온 쥬르노(Buon giorno): 이탈리아식 아침 인사. 여기서는 '안녕하세요'의 의미로 쓴 것이다.
중국인들 틈에 섞여 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 여권 한 페이지에 오래된 미국 유학 비자가 붙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전 출입국 기록에 주요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만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순히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친구 말마따나 내가 착해보였기 때문일 수도, 정말 단순히 근로자의 태만이었을 수도 있다.
새벽 6시 반. 밤을 샌 건지 일찍 출근한 건 지 입국 심사원은 몹시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 인사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여권을 집어들었다. 그러고 나서 딱 두 번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콱'.
힘찬 소리를 내며 스탬프가 찍혔다. '2016년 3월 1일'.
예스, 예스, 예스, 예스, 예스, 예스, 예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신의 비호 아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 달 전 교통사고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내심 내가 여행할 운명인지 아닌지 어디 한 번 보자는 생각이 있긴 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탈리아로 입국하면서 중얼거렸다. 왠지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로마행 편도 항공은 '중국남방항공'을 이용하였다. 같은 해 8월 몽골행 '중국국제항공'을 이용했을 때에도 편도 출국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17년 3월, '아에로플로트 러시아항공'에서는 항공권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법이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에로플로트 발권 직원에 의하면, 이런 경우 항공사가 페널티를 받게 되어 있다고 했다.
이 이후로는 편도 티켓으로 출국을 시도하지 않았다.
편도 출국 이슈는 국내에서 출국할 때에만 발생했으며, 다른 나라 간 이동 시에는 문제된 적이 없다. 인도 델리 공항을 떠날 때만 발권 담당자 상관으로부터 비자(그리스)에 관한 추가 질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