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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샤 Jan 11. 2019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쁨

히말라야 산골 New 라이프 스타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탈리아어 속담 중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쁨"이란 뜻의 "Dolce far Niente"다. 


게으름이라는 뜻이 아니라 휴식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오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그건 뭐랄까, 완벽하게 현재 이 순간을 즐기고 맛보는 능력이다. 이탈리아 인에게 이 개념은 일상생활의 일부이다. 카페에서 친구들과 하루 종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고 와인을 마시며 석양이 지는 걸 바라보고 달빛이 내린 광장 주위를 산책한다. Dolce far Niente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생활신조이자 그 들이 누구보다 잘하는 것이다. 


나는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니 저 속담을 좋아하긴 했지만 현실에 적용한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나는 일 중독자였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 11시까지 주말도 반납하고 일만 했다. 

친구와 가족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쓸 시간은 없었다. 세상이 일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 세상에서 월급이라는 배터리를 받으며 젊음을 바쳤다. 


그 당시 내가 주로 반복했던 말은
"피곤해" "졸려, 자고 싶어" "일이 너무 많아" "시간이 없어"였다. 


모든 할 일을 날짜별로 시간별로 나눠서 계획했는데도 난 성이 차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무능력하고 가치 없는 것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무한경쟁사회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불러왔다. 남들 달릴 때 나도 열심히 달려서 그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게 세상에서 내가 배운 가치였다. 


쌍코피까지 터져가며 치열하게 살던 나의 일상에 경종을 울린 건. 하나의 질문이었다. 

내일 죽는다면? 행복할 것인가?


하지만 만약 이 일을 그만둔다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내 인생이 끝날 것만 같은 불안감과 걱정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저 답에 대한 질문을 찾아보기 위해.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사실 사람들은 일상을 떠나 현실에서 벗어나면 그곳이 어디든 심신을 달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라다크에 와서 비로소 그 기쁨을 느끼고 있다. 

"Dolce far Niente"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쁨" 말이다. 


한국에서 두 달 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하면 무능력한 백수 취급을 받거나 사회 부적응자가 될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두 달 동안 난 한국에서 안 하던 것들을 했다. 



1. 인터넷아 안녕

전 지금부터 인도 히말라야 오지로 들어갑니다.
당분간 연락이 안돼도 걱정 마세요. 무소식이 희소식이잖아요!

난 라다크로 떠나기 전 가족과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사실 인터넷 없이 사는 건 불가능이라 생각했다. 매일 손에 철썩 붙어 있는 핸드폰과 가까운 곳에 있는 노트북. 손가락 하나로 접속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아침에 눈만 뜨면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갔으며, 자기 전에도 충전기를 옆에 두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인터넷이 안 되는 세상으로 들어왔다. 사실 이 곳에도 있을 건 다 있다. 오락실, 당구장, 스파, 술집 그리고 인터넷을 할 수 있는 피시방이 있다. 안 그래도 손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피시방을 갔는데 3일 연속 퇴짜를 맞았다. 네트워크가 불안정하다, 인터넷이 끊겼다, 컴퓨터가 고장 났다 등등 이 곳의 인터넷 환경은 정말 열악하다. 어느 하루는 인터넷이 된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이런 웬걸. 페이지 하나 열리는 속도가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수준이다. 속도도 최악이면서 인터넷 이용료는 인도 전체에서 제일 비싸다. 예전에는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눌러보고 이웃 블로그랑 뉴스도 보며 멍 때 리던 시간이 많았는데 이 곳에선 할 일만 하고 나온다. 정말 중요한 메일 확인만 하고 15분 사용료만 지불하고 나온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동안 인터넷이 너무 중요해서 필요했다기 보단 심심해서 시간 때우기로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과 결별 선언을 하고 나니 제일 처음 신기했던 건. 아.. 인터넷 없이 하루를 살 수 있구나.. 일주일.. 2주일을 살수 있구나. 그런 생각으로 계속 디지털 디톡스를 하고 있다.           


2. TV는 있으나 마나 내

지금까지 여행해 본 바에 따르면 비싼 호텔, 싼 호텔, 작은 여관방 모두 침대와 Tv가 있었다. 부대시설의 차이가 확연히 날 뿐 기본시설은 어디나 다 동일했다. 홈스테이에 묵고 있으니 이 곳에도 Tv가 있다. Tv는 거실에 하나 있다. 안 그래도 티비를 좋아했던 나는 잉여 시간을 축내기 위해 거실에 홀로 앉아 티비를 켰다. 티비 본체에 달린 버튼도 눌러보고, 리모컨 건전지도 뺏다 넣었다 하며 열심히 눌러봤지만 도통 켜지질 않는다. 분명히 어제 저녁 먹을 때 온 가족 다 같이 앉아 인도 드라마도 봤는데 말이지. 내가 모르는 수상한 조작이라도 되어 있는 건가? 라며 리모컨을 요리조리 보는데 외출했다 돌아온 동생이 한 마디 한다.

 

'누나 정전이야. 이따 저녁에 들어올 거야.'

그렇게 기다린 저녁 시간. 가족들과 옹기종기 앉아 저녁을 먹으며 티비를 보며 드라마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픽. 티비도 꺼졌고 불도 꺼졌다. 성질이 안 날 수 있나? 한참 재미있게 보고 있었는데 말이지. 궁시렁 대는 나와 달리 남동생은 부리나케 촛불을 내왔고 다들 이야기를 나누며 오붓한 저녁시간을 함께 했다. 이 곳에선 티비와 인터넷의 단절은 일상이다.   

3. 내면의 예술가를 꺼내기 

어느 날 불교 사원에 올라 멍하니 설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언덕 중턱에 걸쳐 앉아 산을 스케치하는 외국인이 눈에 들어왔다. 오호라? 산을 지긋이 바라보고 다시 그리고 다시 바라보고 그리고, 그의 반복적인 움직임은 뭔가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그림을 보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그는 그림으로 여행지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다고 했다. 시내 문방구로 가서 펜과 메모장을 샀다. 펜 하나로 풍경을 감상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4. 눈 마주치면 인사하기 

라다키어로 안녕하세요는 '줄레' 다.

양손을 맞대 가슴에 얹고 줄레라고 인사를 한다. 이 단어가 지닌 힘은 어마어마하다. 생판 모르던 남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동네 이웃이 되어버린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만국 공통어고 여기다 줄레까지 가세하면 공짜 티는 물론이고 가끔 집에 초대받는 행운도 거머쥔다. 남녀노소 나이 불문하고 보는 이마다 인사를 했더니 이젠 길거리를 걷다가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제법 많아졌다.


5. 꿀맛 나는 독서 

구름 동동, 따뜻한 햇살, 테라스에 앉아 시원한 바나나 라씨를 마신다. 가끔 눈 앞에 믿기지 않는 멋진 풍광을 눈으로 마음으로 담으며 편하게 독서를 이어나간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여행의 장점은 바로 여유 있는 독서다.   

6. 천천히 걷기

라다크의 주도 레는 해발 3,500미터에 위치해 있다. 높은 해발을 언급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산병을 묻는다. 고산병은 해발 2천∼3천 m 이상 되는 고지대로 올라갔을 때 산소가 부족해 나타나는 급성 반응으로, 두통, 메스꺼움, 구토 등은 물론 최악에는 뇌와 폐의 치명적인 손상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레 도착 첫날 평소 기력 믿고 무리해서 돌아다니다가 병원에 입원한 여행자를 몇몇 봤다. 그 들에게 내려지는 처방은 병원 침대에 누워 산소를 마시는 거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해발 3천500∼4천m의 티베트 고원, 고산 지대에 사는 인간들은 진화과정에서 주변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변형 유전자를 보유한 인간은 매우 강렬한 자외선 노출과 공기 중 산도 농도가 낮은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하지만 나는 고산지대에서 태어난 이가 아니기에 의식적으로 천천히 걷는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기에 가끔 하늘도 보고, 별도 보고, 지나가는 당나귀랑 눈싸움도 하며 천천히 걷는다. 매일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며 아주 천천히 말이지.

7. 식물들에게 물 주기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아말레와 함께 집 대문 아래 도랑에서 물을 퍼 버드나무와 정원에 꽃에 물을 준다. 버드나무 키가 괜히 크고 통이 넓은 게 아니다. 어찌나 물을 많이 줘야 되는지, 아침부터 바지런히 움직여서 물을 주고 나면 허리가 다 아프다. 나는 이 곳의 여름이 좋다. 7월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유채꽃이 흐트러지게 피어 아예 한 계곡을 덮는 수준이고, 초록 버드나무들은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며, 코스모스 같은 색 색깔의 꽃들이 정원에 한 가득 핀다.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집에는 다들 텃밭이 있어서 시금치, 순무, 당근, 메밀, 완두콩 등을 심어 먹는다. 누가 보면 꽃과 나무, 농작물 알아서 쑥쑥 자랄 거라 생각하지만 모두 라다크 인들의 부지런함으로 일궈낸 기적이다.  


라다크의 기후는 춥고 건조하다. 평균 연간 강수량은 약 80mm이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1년 내내 건조하며 바짝 타는 듯한 햇볕이 내리쬔다. 겨울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며 얼음 왕국이 된다. 이런 삭막한 날씨는 라다크의 헐벗은 산과 메마른 평원을 대변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살아남는 식물은 많지 않다. 식물은 타마리스크 나무(버드나무의 일종, 사막기후에 자란다.), 울렉스 (건조한 모래땅에서 자라는 콩과의 상록관목, 가시식물, 울타리로 많이 쓰임) 및 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식물들이 살아남는다. 그래서 차를 타고 라다크를 여행하면 허허벌판만 보이는 것이다. 그 사이사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초록색 나무들이 우거진 곳은 마을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엔 그 들이 일궈낸 아름다운 정원과 나무 그늘이 있다.

8. 여행 계획 없이 살기 

내일은 이걸 보겠다. 모레는 저길 가겠다. 매일매일 새로운 곳을 안 보면 죽을 사람처럼 난 그렇게 움직였다. 제한된 시간에 많은 걸 보고 경험하려 했던 내 안에 내재된 욕망은 그렇게 여행 내내 날 끌고 다녔다. 해야 할 일, 오전, 오후 꽉 들어찬 일정표를 소화하고 나면 오늘 뭔가 많이 했다는 일종의 성취감이 오곤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는 것은 일말의 죄책감을 불러 일으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온전한 기쁨은 그냥 흐르는 대로 이 순간에 몸을 맡길 때 오는 거다. 그럴 때 비로소 Dolce far Niente를 완전히 경험할 수 있다.


처음 일주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힘들었다. 느긋한 생활 습관을 갖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난 매일매일 새로운 순간들을 내 삶에 추가했다. 갑자기 느려진 세상 속에서 나 자신과 마주하며 새로 만난 단순한 삶에서 평온과 여유를 깨닫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쁨. 단 하루 라도 좋다.

바쁜 일상을 살고 있을 누군가의 할 일 리스트에 Dolce far Niente를 추가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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