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볕 May 04. 2021

(14) 첫 단추의 중요성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호주에 오기 전 영어 화상전화로 영어 공부를 몇 년간 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영어로 된 이력서 또 한 준비했고, 해외에선 Gmail을 주로 쓴다길래 Gmail 아이디도 별도로 만들었다. 


연말이 되면 비영주권자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일자리가 넘쳐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내가 속해있는 디자인 직종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일자리가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호주에서 친구들을 사귀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평일/주말 모두 일을 할 생각이었다.


"스트라필드에서 주말 캐셔 구해요(여)" 


라는 게시글을 보고 문자로 일을 하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다음날 바로 이력서를 들고 면접을 보자는 답장을 받았다. 


다음날 하얗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한 언니가 나한테 와서 면접을 보았다. 비자 타입, 이런 일 해본 적 있는지, 호주 돈 개념은 알고 있는지... 

사실 아직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잘할 자신이 있다고 했다. 

이번 주 토요일 오전 9시에 트레이닝을 할 테니 그때부터 출근을 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캐셔 트레이닝 첫째 날 (1월 8일)


나와 함께 일하던 친구들은 모두 22, 20, 21살

영어도 곧잘 했다. 호주 돈은 너무 모르겠다. 특히 동전들이 너무 헷갈려서 미치겠다. 한국과 다르게 동전의 값어치가 있을수록 동전이 컸다. 그리고 동전이 너무 많았다. 가끔 뉴질랜드 동전도 섞여서 나왔다.

현금과 카드는 또 가격대를 다르게 받았다. 호주는 동전이 5 단위로 끊어지기 때문에... 하..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돈 단위도 제대로 모르고.

마음속으로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나 정말 처음부터 능숙하게 잘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다들 나를 바보로 보는 게 아닐까 하는 피해의식도 살짝 생겼다.


저녁 8시가 다되어서 업무가 끝났다. 


나에게 면접을 봐줬던 매니저 언니한테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트레이닝받았던 OOO라고 합니다. 다름ㅇ ㅣ아니라 제가 일을 못할 것 같아서 연락드려요 ㅠㅠ 고작 하루였지만 너무 일도 잘 알려주시고 잘 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위잉 진동이 한차례 끊기듯 짧게 울렸다.


"안녕하세요. 일이 너무 힘들 것 같나요?? 어떤 사정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연락 주셔서 감사해요.."


답장 온 핸드폰을 두 손으로 붙잡고 천장을 보며 방 안에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같이 이렇게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사람이 새로운 일을 할 수나 있을까... 걱정..


아.. 한국에서 서비스직 알바를 할땐 친절하단 칭찬을 엄청 들었었는데.. 칭찬을 베풀 여유가 없다.



이러다가 일을 못 구하는 게 아닌가 마음이 다급해져 다시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사람을 구하는지 확인을 했다.


"Town Hall에 위치한 이민법무사 사무실에서 마케팅/디자이너 구해요(경력 무관)"


바로 이메일로 입사지원을 했다. 


입사지원을 한 다음날 문자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OO이민 사무소입니다. 이력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내일 오후 2시까지 이력서 들고 아래 주소 사무실로 방문 바랍니다. :)"


우 와우! 생각보다 일자리 구하는 게 쉬운데? 한인사회라서 그런가?라는 오만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일찍 집 밖을 나와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영어로 주문할 메뉴를 당당히 말해야 하는데 혼자 순간 "아.. 뭐지.." 해버리니 

동양인 종업원이 서툰 한국말로 "한국말이 더 편하시면 한국말로 주문하셔도 돼요" 해줬다.

교포였나 보다. 이 동네가 한국인, 중국인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던데 교포들이 많은 듯했다.



[Kelly언니와의 첫 만남]

그렇게 점심을 먹고 TownHall로 갔다.

사람이 너무 많고,  출구도 너무 많아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나 같은 길치에게는 정말 큰 도시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곳이다. 2~8층까지는 오피스 사무실이고 8층부터 꼭대기 층까지는 멋진 호텔이 있는 곳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분홍색 가벼운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앉아있었다. 이름은 "Kelly"였다.

큰 목소리에 빠른 말투를 가진 이 언니와 나는 서로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여기 개꿀이에요. 법무사님도 일주일에 세 번밖에 안 나와요. 나 옷 입은 거 봐 여기 편해"


정장을 입고 온 내 옷이 민망했다. 

성격이 털털했던 이 언니의 인상이 너무 좋아 다음 주부터 회사에 출근하기로 했다.

오후에만 잠시 일하는 걸로. 



그리고 1월 셋째 주인 다음 주에는 한국에서 미리 결제해놓은 어학원을 다녀야 하기에

오전엔 학원, 오후에는 일. 딱 하루를 알차게 지낼 수 있을 듯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눈치 없는 쉐어생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안되는 거 알잖아!]

나는 상처를 잘 받고 그만큼 잘 아물지 않는 성격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그만큼 고생을 많이 했다. 


호주에서도 분명 작은 거에도 속상해하고 울고 지낼 것이 분명하기에 다짐 또 다짐을 했던 생각이


"난 호주에서 정말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거야. 그게 내 목표야!" 


나를 속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목표를 이뤘다는 성취감이라도 있을 것 같았다.

단점은. 그래서 그런지 모두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거다. 


오전에 영어 학원을 다니고, 오후에 첫 출근을 했다.

학원이랑 회사가 가까이 있어서 너무 좋았다. 길을 걷는 순간 사람들은 어디에나 많았다.


출근길에 구두를 신고 가다가 계단에서 넘어졌다.


구두굽이 빠지고 무릎이 긁혔다. 너무 민망해서 아악 소리를 지르고 고개를 들었더니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 여성은 나에게 "Are you okay?"라며 물어봐줬다. 한 손엔 담배, 입에서는 담배 연기가 동시에 나왔다. 담배를 뿜을 시간도 없이 나에게 바로 물어봐주니 괜스레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난 "Thank you"하고 가던 길을 절뚝거리며 걸었다. 


사무실에는 60대 법무사 아저씨와 30대 kelly라는 사무보조 언니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처음에 이 둘이 가족으로 이루어진 관계인 줄 알았다.

Kelly언니가 법무사님한테 


"법무사님 밥 먹었어?"

"우리 뭐하면 돼?"

"법무사님, 이거 법적으로 문제없는 거 맞아? 진짜야?"

"이번 주 안으로 레퍼런스 레터 빨리 써"


하면서 본인의 상사인 법무사님한테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Kelly 언니는 자신의 아버지와 나이 때가 같은 법무사님을 아빠처럼 생각해서 그런다고 말했다.

오.. 유교사상을 파괴하는 이 행동을 보고 역시 해외는 다르구나~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의 문화는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았고, Kelly언니 성격이 보기 드문 성격이었다는 걸 반년 정도 지나니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출근을 하니 사무실에 법무사님이 있었다. 나에게 남자 친구가 있냐고 먼저 질문을 던졌다. 나는 능청스럽게 "남자 친구요? 아주 많죠~"라고 대답했다. 


해외에서 이런 질문하면 엄청 무례한 거라고 유튜브에서 그러던데, 아닌가 보네?라고 혼자 생각했다.


60대 법무사 아저씨는 자녀를 모두 독립시키고, 아내와는 몇 년 전에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외로움을 많이 타는지 나에게 일을 하는 줄 곧 "오늘 저녁에 와인 들고 올 거지?"라고 묻곤 했다.

처음엔 이 상황이 뭔지도 모르고 "아니요? 와인 살 돈도 없는데요? 저 저녁에 바빠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점차 그 수위가 높아져 어느 날은 Kelly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날 쳐다보며

 "아 이혼하고 사니까 내 등 긁어줄 사람 하나 없네. 젊은 처녀가 긁어주면 너무 좋겠다~~" 하더라.

순간 너무 놀래서 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심한 성격이지만 분노하는 마음은 소심하지 않기에  "성희롱 때문에 일 못해먹겠네 진짜!!!!"하고 허공에 소리를 쳤다.

반항을 했더니 당황했는지 법무사님은 나에게

 "한국은 성희롱하면 난리 난다며..? 미투인가..?" 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더라.


이 새끼 한국도 호주처럼 성희롱하면 큰일 나는 거 알면서 나한테 일부러 그랬어 씨발새끼!!! 

내가 가족도 없이 혼자 와서 힘없는 거 뻔히 알고!!!!


kelly언니한테 이 사실을 모두 말했다. 이렇게 성희롱하는데 여기서 가만히 있는 게 맞는 거냐고. 저 여기서 소리치고 화내고 되는 거냐고 물어봤다. 그러니 돌아온 답변은 

"어 이상하네. 원래 그런 말 잘 안 했는데. 이때까지 일했던 사람들이 다 유부녀라서 그런가?"였다.

거기서 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신해야 하는구나 하고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 법무사님은 성희롱을 멈추지 않았다.

"아~ 젊은 영계 먹고 싶네." 라며 나를 쳐다보며 법무사님은 성희롱을 시작했다.


아 진짜 쌍욕을 하면서 일 관둔다고 말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찰나 


Kelly언니가 소리쳤다


"햇빛이 한테 한 번만 더 그렇게 말하면 죽여버린다!!!! 어?!!! 죽여버린다고!!!!!" 하며 소리를 질렀다. 

법무사님은 당황했는지 눈을 껌뻑이며 멋쩍게 웃었다. 


Kelly언니는 듣는 척도 안 하는 법무사님 얼굴에 대고 손가락 욕을 몇 초간 날렸다. 



그 모습을 보고 


'헐, 어른한테 저래도 되는 거야?'

라고 순간 생각했으나


나한테 성희롱을 하는 것 또한 하면 안 되는 건데 이때까지 당당하게 했으니 당신도 비정상적인 행동을 한번 당해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합리화가 들었다. 


이렇게 언니는 몇 번이고 나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 뒤로 코로나가 시작되어 이민 상담을 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뚝 떨어졌고, 법무사님은 사무실을 잘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Kelly언니와 나는 사무실을 우리 것 마냥 사용했고, 나 또한 주말이면 갈 곳이 없을 때 사무실에 나와 에어컨을 시원하게 쐬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가끔 우리는 밖에 나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Queen Victoria Building에서 쇼핑을 하곤 했다.

Kelly언니는 나에게 "맥주 먹으면서해" 하면서 맥주를 주기도 했다. 

보수적이고 딱딱한 회사만 다니다가 이런 분위기를 접하니 "와 호주가 이런거라면 계속 있고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이라 그런가?]

사무실 위에 바로 호텔이라 그런지누가 속옷을 던져놨는데, 사무실 앞 나무에 한참 동안 걸려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13) 모든게 리셋된것마냥 바보가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