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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Jun 02. 2021

(15) 나에게 사랑에 빠진 남자

"오늘 학교 와요? 한국사람 새로 온 거 같은데요"

"우와우 안녕하세요! 오늘 너무 피곤해서 못 갈 것 같아요ㅠㅠ"

"네ㅎㅎ 잘 쉬세요"

"내일은 가려고요! 네넵 감사합니다~~!!"


학원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오빠와 나눈 메시지이다.

내가 어쩌다가 이 분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전반 학원이 아침 8시부터 하는 게 나에겐 너무 버겁고 힘들었다. 그래서 오후반으로 반을 옮겼다. 오후반은 저녁 6시부터 시작된다.

학생비자를 받은 사람들이 호주에 조금 더 저렴한 가격대에 있기 위해서 어학원을 신청한다.

오전에는 발랄한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많다면 오후에는 다들 일을 끝내고 오는 사람들이 많다. 


오후반을 처음 들어가서 수업을 듣는데, 어느 순간 뒤통수에서 자꾸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 기 내 뒷자리에서 끈적하디 끈적한 한 남미에서 온 한 남학생의 시선이 날 떠나질 않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 신경이 쓰이고 저 사람은 왜 나를 계속 쳐다보는 거지. 헉 혹시 내가 너무 예뻐서 반했나? 


수업을 듣고 약 10분간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교실밖에 있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며 쉬고 있었다. 이 소파는 반쯤은 누워있을 수 있을 정도로 폭신했기 때문에 한번 앉으면 몸이 녹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편했다.


소파에 앉아서  천장을 바라보고 쉬고 있는데 또다시 어디서 끈적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길을 돌렸더니 소파 바로 앞 모퉁이에서 아까 그 남미 남학생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뭘 꼬라봐 뒤지고 싶냐" 하면서 센 척을 하고 싶었지만 난 결코 세지 않았기에 "Hey :)" 하며 하이틴 드라마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쿨하게 행동했다 

내가 인사함과 동시에 남미 남자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키가 170 정도 되어 보였고, 갓 제대한 군인처럼 몸이 엄청나게 옆으로 컸다. 구릿빛 피부에 수염은 턱에만 네모 모양으로 있었고, 입은 나시티는 겨드랑이 부분이 배꼽까지 늘어나 있어 이건 입은 건지 걸친 건지 구분이 안 갔다. 그의 코는 너무 높은 바람에 콧대가 미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나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연신하면서 자신은 칠레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호주에 온지는 2년이 되었다며.


그리고 이어 나에게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어봤다. 너무나도 상대방의 정보를 대놓고 물어보길래 불쾌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최대한 부드럽게 대화를 하는 게 나을 거 같단 생각이 들어 나는 남자 친구가 너무 많다고 대답했다. 그는 웃더니 나에게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어봤다. 나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만들어 그에게 알려주었다.


남미 친구는 본인 할 일을 다했다 생각했는지 화장실을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하 팀장 언니한테 "언니 어떤 남미에서 온 남자애가 저 좋대요. 나 인기 짱이당"이라고 카톡을 보냈다.

하 팀장 언니는 나에게 "아시아 피버 일수도 있어 조심해. 근데 뭐.... 서로 맘 잘 맞으면 결혼하는 거고"라고 쿨하고 답장 왔다. 


아시아 여성이 해외에 나갈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가 바로 '아시아 피버'. 조신하고, 남자에게 순종적이며 집안일과 아이를 본인을 희생하면서 지켜나가는.. 모성애가 강한.. 아무튼 그런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여성들을 원하는 남자들을 일컫는다고 한다. 특히 성적인 부분에서 일본 야동을 본 서양 남자들을 제일 조심해라고 했다.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근데 막상 나에게 일이 닥치니 쟤가 아시아 피버가 맞나? 아닌가? 나랑 친구가 되고 싶나? 헷갈리기도 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너무 몸이 피곤해서 수업이 시작함과 동시에 가방을 들고 집으로 가려고 나왔다. 근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길래 쳐다봤더니 아까 그 남미 남자가 급하게 내 뒤에서 오고 있었다. 정말 부담스러울 정도로 우리 집까지 따라올 작정이길래 뭐라도 먹여서 그냥 달래 보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식당에 들어가 대충 치킨을 먹이고 있는데 학원에서 나를 처음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고, 너같이 예쁜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고 자신은 사랑에 빠진 거 같다며 연거푸 부담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살면서 이렇게 사랑고백을 진하게 받은 것도 처음일 거다. 근데 진심은 안 느껴졌다. 싸이월드 쪽지로 고백받아도 이것보단 더 진솔했을 거다. 


식사를 하는 도중 기분이 너무 찜찜해 

"너 아시아 피버야?"라고 난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되돌아온 대답은 "너의 인종은 상관없어 나는 너에게 사랑에 빠졌어"였다

아시아 피버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얘도 나처럼 영어가 유창하진 않았다.


그러나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가기는 커녕 같이 식사를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되어 이 남미 남자애가 아시아 피버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 "한국말 아는 거 있어?"라고 했더니 그는 약간 자신 없는 표정으로 "미야오 미야오?" 하면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며 이거 맞냐고 되물어봤다.


이 미친 새끼  


서양 남자들은 일본 야동에서 여자 배우가 신음소리 내는걸 고양이가 우는 것처럼 들린다고 해서 아시안 여성에게 야옹야옹하며 희롱한다는 정보를 내가 알고 있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친절하게 한국말을 알려줄 뻔했다.



그 이후 그는 인스타그램 DM을 통해 주말마다 나에게 프라이빗한 장소를 알고 있다며 가자고 했다. 싫다고 했더니 자신과 같은 칠레 사람들은 유럽인들과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에 개방적이라며, 나에게 부끄러워하지 말아 달라 했다. 

나는 답변으로 부끄럽기보다는 귀찮고 싫다고 대답했고, 그는 나에게 시 피시 앤 칩스를 먹으며 넷플릭스를 같이 보지 않을래?라고 물어봤다.(우리나라의 라면 먹고 갈래? 와 같은 맥락)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하니 나보고 오픈마인드를 가지라며 여기는 아시아가 아니라며 가스 라이팅을 시작했다.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더니 "오~ Bella"를 남발하며 나에게 답장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를 차단했다. 


다음날 학원에 갔더니 나를 Bella라고 부르던 남미 남자애는 없었고, 새로운 얼굴의 한국인 남자가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는 어디라도 푸념하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다가가 자기소개를 하고 난 뒤에 우리 학원에 이상한 놈이 있다며 설명했다. 한국인 오빠는 막 웃으며 "걔 미친놈인데 잘못 걸렸네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진을 한 장 보여줬는데 그 남미 남자가 한국인 학생에게 찍 접 거리는 사진이 있었다.


"이 사진 속 여자애가 저랑 아는 사이인데 인마(남미 남자)가 자꾸 쫓아가서 제가 한동안 보디가드처럼 있어줬어요. 걔 한국인 여자 일본인 여자 그냥 동양인만 보면 아주 난리예요. 다른 칠레 사람들이랑은 어울리지도 못하고. 무서워하지 마요. 걔 완전 찌질이예요"

"저한텐 칠레 사람들 원래 되게 개방적이라고 저한테 오픈마인드 해라고 하더라고요"

"진짜 이상한 놈이네요. 저 이 학원에 칠레 친구들 있는데 걔네들은 절~~ 대 안 그래요. "


호주에 온 지 한 달도 안돼서 이런 봉변을 당한 내가 안쓰러웠는지 


"이 학원에 저랑 같이 노는 한국인, 이탈리아 친구들 있어요 얘네 엄청 착해요. 학원 자주 나오시면 나중에 저녁이라도 다 함께 해요"


오래간만에 정상적인 대화에 안도가 되었다. 


학원 한국인 매니저에게 가서 남미 애가 나에게 이렇게 행동을 해서 불편하다 반을 옮겨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면서

"우리 학원은 여러 나라 학생들이 오기때문에 이런 성희롱 관련된 거에 대해서 매우 예민해요 

특히 서로 메세지 주고받았을때 본인이 싫다고 했는데 상대방이 계속 그런 행동을 취했다? 이거 고소 가능해요.

심지어 성관계 도중에 여성이 싫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성관계를 지속하였을시에도 고소감이에요.

혹시 그 외에 증거나 문제가 있었다면 학원측에도 말해주고 본인이 원한다면 고소도 진행할 수 있어요"

라며 안내해 주었다.


사실 그 남미학생은 헬스를 열심히 하던 터라 몸집이 컸다. 그래서 나에게 헤코지를 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이 들곤 했었다. 다행이도 이런 부분에 대해선 학원도 호주도 피해자를 위한 제도가 잘 되어있는 것 같았다. 다음부턴 불편하게 했을시 싫다는 의사를 반드시 하고, 이에 대한 증거를 꼭 모아둬야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지면서 어학원을 다니게 하는 유학원은 진심으로 쓰레기 유학원이다. 필리핀에서 만큼의 수업 퀄리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어학원은 환불 무조건 안된다. 내가 환불을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절대로 안 해주더라. 원래 되긴 하는데 지네가 학원 규정이라며 안 해준다. 해주더라도 진짜 조금 환불을 해준다. 

워킹홀리데이.. 일하고 나면 학원 다닐 시간도 없고 힘들다. 한국처럼 자기 계발 개념으로 일+학업을 병행할 거라면 워킹홀리데이 비자에서 사용하지 말고 차라리 비자 연장용 학생비자일 때 그러는 걸 추천. 그때는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아도 다녀야 한다. 출석률이 낮으면 학생비자가 취소되기 때문이다. 출국하고 바로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유학원을 가보는 것도 좋지만 몇백만 원 들여서 굳이 가야 하나 싶다. 친구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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