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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아 Feb 21. 2024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중년의 테피스트리: 착한여자 콤플렉스 해방일지

응급실 안,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어머니는 아무런 미동도 없고, 신랑은 숨죽여 울고 있었다. 차가운 기계음만 가득한 공간에는 우리 둘과 불과 4시간 전에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어머니가 주검으로 계셨다. 가까이서 처음 본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따뜻한 한 인간의 온기를 식게 만든 어딘가에 나의 냉대와 불찰이 있진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이 조여 왔다. 어머니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슬픈 단상만 떠올라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고생만 하며 착하게 산 인간의 삶에 종지부가 이렇다면 인생이 너무 가혹하지 않냐며, 이건 제게 주는 형벌과 같다고 하느님께 화를 냈다.


어머니를 곱게 보내지 못하고 내 몸에 지워지지 않을 인장을 눈물로 새겼다. 그때 내 온 세포에 생채기가 나는 줄도 모르고 가열 차게 울었다. 어쩌면 내가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게 분명하다고 증명이라도 하듯이 울었는 걸 수도 있다. 밖은 벚꽃 피는 봄이었다.


 

사실 난 어머니를 미워했다. 시집을 오자마자 홀어머니인 시어머니를 대신해 시조부모님을 챙기는 손주며느리가 되었다. 이 잘못된 결혼의 원인 제공자는 제 역할 못 하는 어머니라고 원망했다. 곧 시할아버지 시할머니의 병 바라지가 시작되었고, 늘 어깨에 짐 덩이를 안고 지내며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평일에는 일을 하고, 주말이면 효자 남편과 함께 맹목적으로 홀시어머니 챙기고, 다음 코스는 더 병약한 시조부모님을 들여다봐야 했다. 남들은 효부라고 칭찬했지만, 영혼 없는 봉사였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빠진 나는 아이와 주말에 온전히 나들이를 실컷 가볼 수도 없었고, 아이의 유년기 동안 행복한 추억이 없다. 


나와 신랑은 30대라고 하기엔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른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신경과민으로 사소한 일로 자주 부딪히고 언성을 높였다. 마지막 8년은 어머니 병 바라지로, 이어져 내 인생의 20년이 시어른들 병원 바라지로 채워졌다.


 척추 수술로 걷지 못하는 어머니께 운동을 안 하면 평생 못 걷게 된다고 애정 어린 마음보다는 겁을 주며 채근했고,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몇 개월은 내가 갱년기인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그 짧은 병문안 시간에 힘에 부친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그즈음 어머니께서 몸이 급작스레 안 좋아지셨다. 그러던 중 CT 검사 도중에 심정지가 오셨다. 


 한 번도 딸처럼 살갑게 해보지도 못하고, 허심탄회하게 내 마음을 표현해 보지도, 따뜻하게 안아보지도 못한

채 어머니를 보내버렸다. 응급실 안에서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를 끌어안고, 볼을 비비며 죄송하다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래봤자 이미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부정이라도 하듯, 그때 누가 내 어깨를 잡아주었더라면, 나를 강타할만한 후폭풍의 강도가 약해지지 않았을까. 지금보다 더 건강해졌을까. 그때 내가 지금보다 영리했더라면 내 몸이 덜 소모됐을까? 수없이 생각하며 4년을 보냈다.



 

어머니는 가셨고, 난 더 약해진 채, 어미 잃은 남편을 챙겨야 했다. 나도 돌봐야 했다는 것을 이제 서야 알게 됐다. 아마 어머님이 계셨다면 ‘네 몸은 네가 아껴야 한다’라며 나를 걱정해 주셨을 거다. 아기를 낳고 3일째 되던 날, 친정에서 산후조리 중일 때 시어머니가 방문하셨다. 그때 몸이 가벼워진 내가 날아다니듯이 다니니 ‘몸 해깝다고 너무 돌아다니면 안 된다’라며 쟁반도 못 들게 하셨다. 내게 한 번도 듣기 싫은 말, 하기 싫은 일을 시킨 적이 없던 어머니를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미워했다. 


고부라는 인연으로 어머니 존재 자체를 존중하기보다 내 바람과 이상만 투영시켜 인간적인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결혼 기간의 내 불행의 화살을 어머니로 단정 짓는 바람에 행복을 갉아먹은 건 나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날 어머니께 용서를 빌 수 없어 울음으로 나를 닦아세운 걸 수도 있다. 용서받고 싶다는 마음에 비겁하게 눈물로 위안을 삼은 걸 수도 있다. 그런 이기적인 나에 대한 모멸감으로 그 후로 아팠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보니,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상황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일 수 있다고 바라보게 되었다. 나를 이해하며 스스로를 용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 내가 조금 영리했다면, 어머니를 맹목적으로 찾아뵙기보다 즐겁게 마주 볼 수 있도록 가고 싶을 때 찾아뵙는 뺀질거리는 며느리를 택했을 것이고, 악처를 자처했을 것이다. 이제는 싸가지가 부족한 며느리가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다. 단지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서 해방되어 악처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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