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한 번 배울 때, 처음부터 제대로 해야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1) commitments,
2) situations,
3) moments,
4) achievements
5) services
6) educations
모처럼 5지선다 객관식으로 퀴즈를 내보았다. 당신은 몇 초만에 이 문제를 풀었는가? 고민의 여지없이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걸러냈다면 당신은 정확한 명사 공부가 된 사람일 것이다.
10일이 넘는 시간을 인턴십 지원서에 매달렸다. 지금까지 몇 번의 굵직한 지원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만큼 신경이 많이 쓰이고 준비해야 할 자료가 많은 적은 없었다. 서른 개가 넘는 각종 서류를 제출했고 커버레터와 이력서를 새로 작성했다. 나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글 자체를 평가하기 앞서 글의 형식과 목적부터 경험 부족으로 인해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십 수년간 영어를 배우고 사용해왔지만 여전히 내 영어는 구멍 투성이다. 영어권에서 처음으로 배우지 않고 공교육을 쭉 따라왔기 때문에 학술영어와 시사영어에는 강세이나 일상 언어, 특히 원어민들이 고등학교 이후로 사용하는 언어에는 대단히 부족함을 느낀다. 한국의 공교육은 대부분 미국의 공교육 언어를 배우기 때문에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볼 법한 내용들은 사용자가 직접 찾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뭐, 한 편으론 그런 거까지 공교육이 책임지기 어렵긴 하네만.
내가 이번 커버레터를 작성하며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은 지적 중 하나는 글 쓰기 자체에 관한 것이다. 한 단락에 하나의 중심 내용.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막상 적으려니 직관적으로 머리에 잘 안 들어오는 것인지 수 십 번을 첨삭해야 겨우 간결한 글이 한 편 나온다. 적고 나면 참 쉬운 언어로 적힌 글일 뿐인데. 하긴 한국인이 우리말로 자기소개서를 적어도 3자에 의해 교정을 받으면서 훨씬 글이 좋아지는 이치일까? 외국어인 영어는 여전히 내게 미지의 세계다. 또 다른 지적 중 하나는 바로 명사다. 아니, 문법도 아니고, 수준 높은 단어도 아닌 명사? 그렇다. 영어의 명사에는 셀 수 있는 명사와 셀 수 없는 명사가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맹점은 우리가 명사를 배울 때 특별한 인지 없이 명사를 배운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말로 물질에 해당하는 명사들은 셀 수 없으니 영어에서도 복수형인 -s가 존재하지 않거나 명사 앞에 부정관사 'a'를 붙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이해한다. 그런데 영어에는 논리가 아닌 경험으로 익혀야 할 셀 수 없는 명사들이 많다. 위 문제의 정답은 services와 educations다. 다른 명사들은 셀 수 있어서 복수형이 가능하나 서비스와 교육은 셀 수 없는 명사다. 우리말로 따져보면 얼추 다 될 것 같다. 특히 서비스들은 자주 쓰는 우리말이 아닌가? 오히려 헌신(commitment)은 셀 수 없을 것 같은데.
참고로 나는 고등학교 수업을 열심히 들었던 사람인지라, (정확히는 학교 수업만 들어도 된다는 말을 너무 맹신한 탓에) 1학년 문법 시간에 배웠던 교재와 내용이 기억난다. '자동사로 헷갈리기 쉬운 타동사' 편에 가면 discuss, approach, resemble 등을 포함한 몇몇 단어들의 용법이 우리말 해석과 달리 타동사에 해당돼 바로 목적어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편이 있다. 끽해야 10개 미만의 동사들이 그렇게 나열돼 있다. 그러나 이 외의 내용에 대해 누구도 수의 중요함을 가르치지 않았다. 단지 추상 명사, 물질 명사 등의 그 자체로 추상적인 문법 용어만을 들었지 그 개념 속 단어들을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선생은 학원과 학교 통틀어 아무도 보지 못했다. 나는 이 작은 깨달음을 공교육 포함 20년이 흘러야 얻었다.
나는 독일어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독일에서 혹은 원어민에게만 배웠기 때문에 영어만큼 고급 어휘나 표현은 적게 구사할지라도 정확한 문법과 명사를 구사한다. 왜냐하면 독일어는 구조적으로 복수형을 따로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는 복수형에 일괄적으로 -s를 붙이면 그만이다. 독일어는 명사마다 소정의 규칙을 동반해 여러 복수형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명사를 배울 때마다 명사의 복수형을 확인해야만 하고 자연스럽게 셀 수 없는 명사와 셀 수 있는 명사를 구분하게 된다.
우리 영어 공부환경은 어떤가? 당신은 지금 한 동네서점에 왔다. 저 멀리 중고등생 학습 코너가 있다. 수많은 단어책들이 꽂혀있는 책장 앞에서 아무 단어책이나 한 권 택해 펼쳐보라. 상당 부분 예문이 없는 책도 있을 것이고, 셀 수 없는 명사인지 아닌지 표시가 안될 수도 있다. 즉, 우리가 공교육에서 접하는 단어책은 사전이 기능이라기보다 편한 암기를 위한 기능만을 제공한다.
쉽고 정확한 용법을 요하는 전문적인 글쓰기에서 명사의 잘못된 사용은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낼 수도 있다. 비단 명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말에서 같은 뜻인 '나타내다, 보여주다'로 번역되는 동사들 highlight, demonstrate, indicate, illustrate, suggest 등 단어가 있다. 여기서 어떤 동사는 뒤에 문장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highlight는 보통 명사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머릿속 공식이 아닌 좀 더 관습에 의존해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것이 영어공부다.
평소 말하기나 읽기에서 의식하지 않던 문제들이 막상 내가 정확한 언어를 구사해 글을 쓰려고 하니 온통 물음표 천지가 된 느낌이었다.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나는 그래도 시골에서 학교 시험이 아닌 진짜 영어 실력을 위해 가르치는 학원에서 영어를 배웠는데. 누군가 질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외울 줄은 몰라도 보면 알아요'를 강조하는 한국의 학풍 탓이다. 적어도 우리 세대 분위기는 한자도, 영어도, 자기가 외워 쓰진 못해도 보면 알 정도로 공부하게 만든다. 왜냐? 시험이 보고 듣는 시험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사용해야 할 언어는 말하기와 쓰기도 있다.
"당신은 유학까지 가서 영어로 대학원 과정을 이수한 사람 아닌가?"
맞다. 근데 나는 독일에서 공부하니까. 아무래도 그 효과가 덜하다. 주변에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다. 내가 그들의 글을 읽지 않는 이상 말하기 속 그들의 언어는 늘 불완전하다. 게다가 내 주변 동기들은 한창 어린 23-24살의 학생들 아닌가.
솔직히 언어란, 누구든 마스터했다고 할 수 없다. 특별히 겸손을 떠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잘하는 분야의 언어가 있으면 못하는 분야의 언어가 있다. 군 생활할 때 나는 부대 내 어떤 한국인보다도 정확한 군사용어를 구사하고 번역했다. 물론 그리 되기까지 또 많은 스트레스를 동반하며 단시간에 공부를 해내야 했다. 다음에 썰을 풀어 보겠다. 지금의 나는 정치학 전공에 관련된 용어들을 읽고, 듣고, 쓰기 때문에 그쪽 분야의 언어의 정확성과 수준은 높아져 있다. 하지만 구직에 필요한 언어는 또 부족함을 느낀다.
배울게 너무 많다 생각하니 설렘보다는 짜증스러움이 밀려온다. 언제까지 갈고닦아야 하는가. 일단 어딘가는 들어가고 결정된 뒤에 조금씩 하면 안 될까. 사실 이 모든 내용은 나의 마음이 어딘가 불편하기 때문에 나오는 불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공부를 마쳐가니 느낀 점은, 독일에서 나의 시야는 넓어졌지만 한 없이 겸손해졌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그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당연한 처사다. 이 모든 과정이 나의 내공 향상을 위해 필요한 것임을 절감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지치고 한 없이 지겹다. 앞으로 이메일을 적더라도 다시 명사들을 한 번씩 사전에서 찾아보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신랄한 자기비판과 더불어 사회비판을 하고 나니 속이 좀 편한가 싶었는데. 그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