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진행 중
이 글은 생각의 우열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이 주제 또한 지금까지의 내 생각을 정리함과 동시에 내 삶과의 접점을 통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스스로 정리하기 위함이다.
나는 신앙을 가진 지 이제 22년 차다. 초등학교 2학년, 아무 생각이 없던 시절... 엄마 손을 잡고 동네에 있는 성당에 갔다. 같은 반 친구도 있었고 모르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렇게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신앙이 생겼다.
내 신앙은 시기에 따라 몇 개의 특징을 지닌다. 고등학교 때까지 사실상 성당은 내 인간관계의 중심이었다. 학교는 다르지만 많은 수의 친구들, 형 동생 누나들이 있었다. 돈을 쓰지 않아도 즐겁게 놀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매우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정보화 및 자동화가 계속될수록 우리는 아날로그적 삶을 잃어간다. 한창 성당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내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만 해도 재밌었다. 매일 보는 그 친구들과 촛불을 켜고 '진실게임'을 하며 이미 다 알고 있는 성당 내 꽁냥꽁냥 연애사도 파악했다. 처음 전자음악을 경험하며 밴드를 했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고 노래 불렀다. 우리에게는 앉을 수 있는 자리와 촛불 하나 그리고 통기타 한 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었던 친구들이 항상 함께했다. 내게 신앙은 현실 세계의 즐거움이었다. 몰래 성당 지하 강당에 숨어 시험공부를 하기도 했다. 어떤 친구가 TV에서 본 것처럼 로맨틱한 사랑고백을 하고 싶다기에 밴드가 동원되어 즉석 반주를 해주기도 했다. 한 친구가 해외로 멀리 떠난다는 말에 즉석에서 우리끼리 작은 음악회를 연적도 있었다. 사람과 음악 그리고 그 안에 따뜻한 이야기가 있었기에 삭막하지 않았고 우리의 시간은 아름다웠다.
대학을 가게 되면서 멀리 서울에 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서울에서의 신앙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을 이미 시골에서 느꼈던 것일까? 이상하리만치 바쁜 일상에서 나는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듯 미사만을 참례했다. 어른의 세계는 다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그런 거야. 나는 이런 말이 정말 싫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한 곳에 정착해 지난날의 그리움을 채워보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고려대학교 근처 성당에서 잠시 봉사를 할 때였다. 얼굴도 모르는 고3 학생들이 수능을 앞두고 부모님들과 마지막으로 미사를 하는 날이었는데 그 성당 보좌신부님께서 내게 노래와 반주를 부탁하셨다. 나는 (물론 중국집 탕수육을 바란 것은 아니다) 흔쾌히 요청에 응했고, 오래된 분위기 무르익는 성당 노란 불 빛 아래 마이크를 설치하고 통기타를 반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문득 내 고3 수능 미사가 생각났다. 나는 그때 밴드부에서 은퇴한 뒤 고3 좌석에 앉아있었다. 신부님께서 한 명씩 미사 중 기도를 해주셨고 나와 동기들은 제대 앞에 일렬로 서 있었다.
20대 중반이 지나면서 내겐 신앙이 완전히 나와의 대화의 장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사를 더욱더 많이 하게 되면서 몇 개월씩 그나마 정착할 수 있었던 기회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군대를 가서, 교환학생을 가서, 유학을 와서. 난 참 무슨 복인지 이사를 많이 다녔다. 20대 중반이 넘어가니 내 삶에 중대한 일들이 더욱 많아졌다. 기껏해야 수능시험 정도가 가장 큰 이벤트였던 지난날과 달리 지금은 작든 크든 선택이라는 커다란 벽을 매 순간 맞이한다. 아, 이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실감 난다.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두려움을 해소하는 것은 그 순간이 지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수많은 내적 고뇌를 겪는다. 신앙은 그럴 때 '어떻게 고뇌를 할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그 순간을 받아들일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줬다. 아마 보편적인 행위로 기도를 꼽는다. 기도가 반복되면서, 내가 이성과 감성이 자라면서 그 기도의 폭이 넓어지고 빈도가 올라간다. 그렇게 신앙이 조금씩 깊어진다.
31살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장소와 언어가 바뀌고 분위기가 다소 고전적으로 변했다는 것 이외에 내적인 것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은 없고 기도는 늘 내 마음속에서 중얼거리는 하나의 독백이자 신과의 대화였다. 신앙도 공부가 필요하다. 무턱대고 좋은 것을 많이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착한 일 많이 하고, 성당 열심히 나가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좋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무엇이든 인간의 행위는 배워서 '잘'하면 좋다.
이제 이 글의 본론이자 결론을 내겠다. 내가 이곳저곳에서 배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은 '사랑'이다. 여러 대상 중 당연히 가장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다. 나는 신학자가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신자 중 한 명이기에 어렵게 성경을 인용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내가 한 신부님을 통해 배우고 익힌 내용을 사유의 시작으로 삼고자 한다.
인간이 기도를 통해 원하는 것을 밝히는 것을 '지향'이라고 한다. 건강, 소원, 행복, 문제의 해결 등 많은 것을 청할 것이다. 가톨릭에서도 구복 신앙이 잘못된 것이거나 토착신앙이 아니다. '구하라 얻을 것이다'는 말은 성경을 넘어 참 보편적으로 쓰이는 구절이 아닌가? 교황청으로부터 공인받은 성모 발현지도 각각 특색이 있다. 벨기에 바뇌의 발현지는 특히 아픈 사람들이 치유를 위해 찾는 성지다. 그곳에는 많은 목발들이 버려져 있고, 작은 타일에는 치유에 대한 감사를 적은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처럼 기도의 중심에는 구복이 있다.
그런데 지향 중에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사랑'이다. 신을 사랑하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 기도의 첫 번째가 돼야 한다. 왜냐하면 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간이 왜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존재인지 답을 할 수 있는가? 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 우주의 원리를 알아간다고 해도 그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가톨릭에서는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닮은 존재를 창조했다고 설명한다.
자, 복잡한 이론은 조금 떨어뜨려두자. 내가 첫 지향으로서 사랑으로 삼고 나니 어느 순간 내가 받고 있는 신의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게 됐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평균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특혜'를 받으며 살고도 있다. 가톨릭 영성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랑의 출발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특별한 노력 없이도 어느 순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번진다. 믿고 따블로 가보기로 했다.
기도의 중요 요소 중 다음은 '정화'다.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서 고해성사를 한 뒤 용서받는 것만이 정화가 아니다. 내가 배운 영성에서 정화는 오로지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유 없이 걱정이나 옛 일이 과장되어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어둠이 생겨나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힌다면 그것은 어쩌면 정화의 문제일 수도 있다. 때때로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짧든 길든 사랑의 기도와 정화를 청하는 정화의 기도를 지향에 두고 열심히 기도하면 그것이 해결된다. 해결이 안 된다면 기도가 부족한 것일 뿐. 그 신부님께서는 기도의 본질이 사랑에 있고 정화만 된다면 그 이외의 것들은 못할 것이 없다고 역설하셨다. 그러면서 인간은 다음과 같은 덕을 추구해야 한다고 덧붙이셨다.
첫째, 이웃 사랑의 덕이다. 이는 자신과 신과의 관계가 사랑으로 맺어지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둘째, 단순함의 덕이다.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은 제자와 길을 나서면서 두 갈래 길이 나왔을 때 동전을 던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느낌일까? 이 단순함은 그저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을 늘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 할 말이 많다. 나이가 들어도 순진하지는 않더라도 항상 순수함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어려웠다. 그러나 포기는 않는다. 너무 많이 알아가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겁 없이 촐랑대며 내 앞에 무언가를 해나가던 그 시절처럼 우리는 삶에 임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셋 째는 가난함의 덕이다. 이것은 지금의 나는 정말 실천하기도 어렵고 그 실체를 이해하는 폭이 너무나 좁다. 다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두 가지의 기도와 세 가지의 미덕을 소개했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종교적으로 파고들 내공도 없고, 한 종교 내에서 우열을 가지는 이론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 내용들은 가톨릭 신자라면 한 번씩 경험하는 묵주기도의 기도문 속에 녹아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눈 앞의 있는 것도 곱씹어보고 지혜의 창을 통해서 봐야 이해의 폭을 넓혀갈 수 있는 존재인 듯하다.
나는 유학을 하면서 신앙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했다.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서 신앙에 기대는 정도가 더 커진 것도 사실이다. 다만 빈도만 높아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일까 문득 궁금함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을 때로는 체험으로 때로는 공부를 통해서 배우고 실천해 나가고자 한다.
그 신부님의 말씀처럼 나는 신 앞에서 가난한 구도자의 길을 걷고 싶다. 인간의 본성을 이탈해가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