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조교
재수를 하면서 만난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사방이 꽉 막힌 산꼭대기에 덩그러니 우뚝 서있는 외로운 건물에서의 삶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게 많았나 싶겠지만 1년이라는 세월이 짧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속에서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서야 뒤늦게 고마움을 느낀 사람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남부터 고마움을 느꼈던 사람들도 있다.
수학조교들을 처음 만났다. 수학조교? 조교? 처음 듣는 직업이었다. 간단히 수학조교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학원 내 지정된 장소(보통 빈 강의실이나 상담실과 같은 교실 외 별도의 공간)에서 학생들이 모르는 문제를 즉석에서 해결해주는, 즉 질의응답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학조교들은 모두 갓 대학에 들어간 20대 초반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불과 1년 전 남양주 기숙학원에서 재수를 했던 선배들이기에 우리의 삶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기억하며 우리만의 고충을 이해하는 존재였다. 자연스럽게 수학문제 외에도 학습 전반에 대해 조언해주는 동년배의 편안한 존재였다. 잔뼈는 굵지만 알게 모르게 불편한 어른 선생님들께 못다 한 이야기들을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존재들이랄까. 그들은 곧 성공의 아이콘이자 우리가 걷는 어두컴컴한 앞길에 나름의 불빛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존재들이었다.
주말을 통째로 활용해 모든 원생들의 틀린 수학 문제를 풀어주고 설명하는 것이 주임무다. 왜 학원에서는 다른 과목도 아니고 수학만 운영했을까? 생각해 보면 문이과를 통틀어 수학이 가장 어렵거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과생들에게 수학은 대학입시의 바로미터와 같다. 입 아프니 더 이상 설명 안 하겠다. 문과생들에게는 '수학이 싫어서, 수학이 어려워서' 문과에 온 학생들에게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상위권에게는 당시 수학의 입시에서의 가중치나 표준점수가 높았기에 중요했다.
수학은 다른 과목과 비교해 훨씬 논리적이고 독립 문항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10분, 15분 이내에도 짧고 명쾌한 해결이 가능했다. 이과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문과생에게도 수학은 중요하다.
훌륭하다. 질문을 장려하고 바로 답을 해줄 수 있는 시스템과 취지 모두 '공부'에 적합하다. 묻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면 지식을 정복할 수 없다. 아무리 학문의 기초만을 응용해 대학수학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일지라도 그 나이, 그 단계에 맞는 학습의 자세를 구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공부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궁금해하고 찾아보고 이해하며 축적된다. 그런 맥락에서 수학조교의 필요성과 유용성은 값을 매기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모든 과목의 강사들이 요일을 정해 당직처럼 돌아가며 야간 자습시간을 이용해 교무실에서 질의응답을 진행했다. 하지만 500명에 육박하는 학생들의 수많은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질문이 많다고? 한국 사람들이 질문을 그리 많이 했던가? 그렇다. 훈련이 안되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아 눈치를 보며 적당히 넘어갔을 뿐 똑똑한 한국인들이 질문을 하기 시작하니 봇물처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무실은 매일 저녁 학생들의 이름을 각 반에서 전달받아 질의응답 순번지를 만드느라 전쟁이었다. 경쟁이 치열하니 대기열에도 이름을 올린다. 그나마 대기란에 이름이라도 올리면 다행이지만, 이름도 올리지 못하고 명단에서 잘리기 일쑤였다. 그럼 그날은 궁금해도 참던지 혼자 고민해야 했다.
나는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다. 입소 후 첫 수학 수업부터 질문거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분명 행렬에 대한 개념이었고, 이 부분을 내가 모를리 없었다. 당시에는 AB=BA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를 통해 a, b, c, d, e 여러 응용 명제들을 파생한 뒤 이들 중 옳은 것만 고르는 문항이 트렌드처럼 계속 출제됐다. 나는 고3까지 이 유형을 그저 감으로 풀었다. 학교도, 동네 학원도, 문제집 어느 곳에서도 단순한 명제 외 응용되는 문항을 미리 도식화하고 유형화하지 않았다. 온갖 유형들을 이미 문항이 아닌 개념으로서 정리해주는 수업을 기숙학원 첫 수업에서 목격했다.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속에서 올라왔다.
'젠장, 서울 애들은 저걸 저렇게 유형화시켜서 빠르게 습득하고 있었다니... 대박이네.'
첫 출근한 수학조교들을 만나 쌓아뒀던 궁금증들을 해결해 보기로 했다. 학원에서 질문을 많이 가라고 하니 한 번 믿어 보자는 심보로 찾아갔다. 세 명의 조교들이 출근했다. 담임선생님이 수학조교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고 간단하게 조교들의 프로필을 알려주셨다. 서울대 정환이형, 성균관대 형동이형, 한양대 민성이형 이렇게 대학교 새내기이자 남양주에서 재수를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들이었다.
누구한테 갈까? 그냥 제일 좋은 대학 간 사람한테 가자 마음먹었는데 다른 친구들도 모두 비슷한 생각인지 질문희망자 손을 들어보니 경쟁자가 많았다. 나는 민성이형에게 배정됐다.
한적한 주말이 다가와 어느새 질문할 시간이 됐다. 한두 시간 전부터 질문할 생각에 설렜다. 이제 찾아가 질문을 해볼까. 2층 복도 끝 통유리 창 내부에 작은 공용 공간이 있었고 널찍한 책상 세 개가 있었다. 조교들은 각자 책상 하나씩 맡아 앉아 있었고 그들의 옆자리에도 의자가 있었다. 앞에는 조교들의 이름표 세워져 있어 학생들이 찾아갈 수 있도록 해뒀다. 이름표를 보고 담당 조교를 찾아 반갑게 인사를 한 뒤 가져온 문제를 주며 질의응답을 시작했다.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조교들의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괜한 고약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문과 최상반이고 수학만큼은 1등급으로 재수를 시작해 방귀 좀 뀐다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교만함이 숨어있었을지 모른다. 2, 3점짜리 쉬운 문제를 물을 필요 없었고 내가 모르는 문제 중 가장 어려울 것 같은 문제를 골라 먼저 물었다.
'얼마나 잘 푸는지 한 번 보자'
문제를 보여주자 민성이형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금세 "흐음, 꽤 어려운 문제네요" 한 마디 던지더니 A4용지에 술술 풀어내며 동시에 설명을 해준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이 밀려올 법한 명쾌한 풀이였다. 분명히 너무 어려웠던 문제고 도저히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문제였는데 그것을 별 특별한 고민도 없이 술술 풀어낸다. 설명들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한 심지어 학원 강사들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그런 상쾌함? 깔끔함? 시원함? 명쾌함이었다. 나는 그 순간 첫눈에 반하듯 조교에게 매료됐다. 수학의 신이네. 이렇게 짧은 10분간의 첫 만남이 마무리됐다.
다른 조교들도 한 번씩 질문을 해보니 문제를 잘 풀었다. 하지만 무언가 내 논리적 사고가 명쾌하게 이해하는 데는 첫 질문을 했던 민성이형이 가장 잘 맞았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민성이형에게만 질문을 갔다. 수학문제들을 미친 듯이 풀어 해결했었고, 또 조금 지루한 시간이다 싶으면 대학생활이 어떤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수개월이 지나 기숙학원에서의 공부가 힘들고 심리적 슬럼프에 빠졌을 때 민성이형과 상담을 하고 나름의 해법과 마음의 위로를 받아 힘을 얻기도 했다. 수학조교는 1년간 공부를 해나가던 내게 기숙학원이라는 사막에서 내리는 단비와 같은 존재였고 여러 방면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이었다.
바깥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수학조교라는 것이 단순히 아르바이트 생에 불과할 수도 있다. 반면 기숙학원 내의 학생들에게는 처절한 삶 속의 한줄기 빛인 동경의 대상, 본받고 싶은 대상,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수험생활을 해나가며 작은 목표가 생겼는데 바로 수학조교처럼 폼나게 대학도 가고 졸업(우리 학원은 재수가 끝나는 것을 졸업이라 불렀다)하면 나도 수학조교가 되자는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약 1년 후 그 통유리 교실에 다시 들어왔고 내 이름표를 걸고 수학조교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내 두 번째 수험생활에 스쳐간 수많은 인연 중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2009년 2월에 만난 수학조교들이었다.
첫 수학조교들은 약 반년 뒤 군대를 갔고 2기 수학조교들이 왔다.
5-6년이 지나 나도 군대를 다녀온 뒤 어떻게 민성이형과 연락이 돼 한양대학교 앞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성이형이 말했다.
"너가 유일하게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야."
어찌 내가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이미 몇 년 간 수학조교로 일을 한 뒤였기에 나를 가르친 조교들은 내 마음속 늘 향수와 같이 기억됐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