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일루아의 고양이 Aug 10. 2021

옥수수 할아버지에게로 가는 길

정사각형 캐러멜로 나가자마자 걸쭉한 시럽으로 흘러내릴 것만 같은 한여름이면 태양의 기세가 한풀 꺾인 여섯 시 사십 분쯤 집을 나섭니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서 시려진 눈이지만 옅은 살구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는 하늘만큼은 기막히게 포착합니다.


구름이 이렇게까지 예뻤나 싶은 요즈음입니다. 바람도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오미자차 같 쨍한 맛이 아닌 애플민트 두어 닢 떨어뜨린 냉수 같은 시원함입니다. 매일 마주하는 자연이지만 매번 놀랍습니다. 같은 듯 하루도 똑같은 날은 없습니다. 한결 청량해진 마음으로 가볍게 산책길에 나서 봅니다.



향하는 곳곳마다 하늘이 예술입니다. 이어폰을 꽂지 않아도 발걸음에서 폴짝폴짝 리듬감이 느껴집니다. 우울할 땐 무조건 몸을 움직이라 했죠. 누군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루 종일 쌓였던 이런저런 고민거리들도 이 길에선 싱긋한 풀내음에 잠시 묻힙니다.


자연 앞에선 모든 게 상대적으로 작아 보입니다. 커봤자 쓸데없는 번뇌나 알량한 자존심 같은 것들 말입니다. 먼지 더께를 바람결에 후우 불어낸 마음속엔 좋은 것들이 들어설 자리가 넉넉합니다. 용량 꽉 찬 휴대폰 사진첩에서 망작들을 걸러낸 가뿐한 기분이랄까요. 이제 즐거운 추억들로 내 마음속 폴더를 다시 알록달록 채워갈 일만 남았습니다.



해가 저물어가며 마지막으로 고운 햇살을 내비칩니다. 다 죽어!의 기세로 내리쬐던 한낮의 땡볕과는 결이 너무도 다릅니다. 온화함으로 물드는 시간입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부드러운 이들도 함께 휘감기는 시간대입니다. 따갑지 않고 그저 따스합니다.


정신없는 하루 중에 잠시 잊고 지냈던 이들도 그제야 생각납니다. 급할 것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실어 보냅니다. 집에 돌아가면 이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과 함께 보고 싶었노라고 짤막한 메시지라도 보내야겠습니다. 그리운 이들도, 감사할 것들도 잔잔히 떠올라 밤바람 한 숨에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연꽃축제를 찾지 않아도 산책길 한 귀퉁이에 핀 연꽃들을 발견하는 행운도 찾아왔습니다. 오는 길엔 수변공원을 노랗게 물들인 금계국의 반짝임에 설레었고요. 가을빛을 닮은 부드러운 노랑이라 해 질 녘의 색감과 잘 어울립니다.


이름 모를 꽃들은 산책에 나설 때마다 한 분씩 차근차근 통성명할 예정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뭐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겨가는 게 이 산책길의 매력이니까요.



옥수수 할아버지는 산책길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올레길 인증 도장이라도 받아가듯 세 개에 오천 원짜리 찐 옥수수 한 봉을 사 가는 게 제 산책길의 미션입니다. 남들에게 후한 사람이 되고픈 만큼 제게도 잊지 않고 마음을 넉넉히 쓰기로 했습니다. 나와 언제까지고 함께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완벽주의적 성향에 걸맞지 않게 허당끼 넘치는 일상은 오래도록 저를 힘들게 해왔습니다. 제 자신을 다그치듯 친구들을 대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제 주위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거예요. 채찍보다 당근을 좋아하는 저에게 이제라도 당근을 아낌없이 선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가 나를 안 아끼는데 세상 누가 나를 귀히 여길까요. 나만 생각하면 안 되지만, 나부터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를 곱씹어봅니다. 더운데 귀찮아... 하며 버티던 몸을 이끌고 이 산책길의 끝까지 걸어온 제 자신을 셀프 쓰담해봅니다. 건강한데 심지어 맛까지 좋은 선물도 안겼습니다. 찜통에서 갓 나온 찰옥수수의 뜨끈한 질척임이 싫지 않은 밤입니다.



파스텔빛 하늘에 신기하게도 반투명 거미줄이 커다랗게 비칩니다. 배가 통통한 왕거미 한 마리가 느릿느릿 거미줄을 오르는 모습도 보이네요. 벌레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렇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게 무해한 곤충들을 가만히 살펴보는 일은 나름 즐겁습니다.


자연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쑥 놀라움을 안겨주기에 매번 새롭게 느껴지나 봅니다. 촘촘하고도 균형이 완벽한 거미줄에서 어떤 예술품 못지않은 숭고미를 느낍니다. 저마다 어딘가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지어내고 있을 생명체들을 떠올리면 조금 숙연해집니다.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지 않고도 불현듯 깨달음을 주는 자연이라 언제 다가가도 편안한 걸까요?



옥수수를 들고 돌아오는 길. 어디선가 대금소리가 들려옵니다. 차를 세워두고 공원 초입에 앉아 음악을 연주하는 본새가 한두 번 이곳을 찾은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멋쩍게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지만 음악소리가 너무 좋았노라고 응원의 한마디를 전합니다. 힐끗 뒤돌아보니 내내 앉아서 연주하던 아저씨가 어느새 일어나 흥취를 실어 보내시네요. 역시 칭찬은 풍류가객도 춤추게 합니다. 낯선 이에게 인사 한마디 건네기가 더욱 조심스러워진 코로나 시대이지만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어느새 우리 마음을 스르르 무장해제시켜 버리네요.


한 바퀴 돌고 오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습니다. 연분홍빛으로 물들어가던 하늘이 마침내 벽력 같은 빛을 내뿜고 사그라들 시간입니다. 즐겨 쓰던 서울스칼렛이란 립밤을 닮은 선홍빛 노을이 밤새 모닥불을 피우고 꺼져가는 장작과 닮아 있네요. 뭉근한 여운을 남기며 오래오래 머물다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따끈한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옥수수에 빠다를 아낌없이 펴 바릅니다. 입술이 번들번들해지도록 고소한 식감을 알이 음미하는 이 순간. 더 바랄 것 없이 좋습니다.


슴슴한 듯 찰진 행복이 흐르는 8월의 어느 평범한 월요일 밤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을 낚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