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호-효정씨
동굴속으로
Rashelle reyneveld
Garðastræti ****
101 Reykjavík
Apt ***
지난 1월, 주소를 알려주며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는 연락이 Rashelle로부터 왔다. 미국인인 러셀은 학교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했지만 음악으로 전향했다. 엠비언트 음악에 가까운 보컬과 하프 연주가 특별한 분위기를 만드는 음악을 만든다. “러셀에게 편지 쓰기”가 몇 개월 동안 머리 한쪽 귀퉁이에서 뇌 용량을 차지하며 옅은 빛으로 깜빡였지만 다른 일에 밀려 이내 잊혔다. 간혹 희미한 불빛을 볼 때마다 아, 참 러셀에게 편지해야 되는데… 하다가 반년이 지났다.
말을 너무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내 안에 있는 말을 너무 많이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부터 그랬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얘기를 많이 하고 돌아온 날은 헬륨가스로 채워진 풍선처럼 몸이 가벼워져 천장에 떠 있는 기분이다. 그럴 때는 다 소진된 듯 기운도 없고 더 이상 뱉어 낼 말도 없는 것 같다. 내 안에 말이 생성되고 그 말들이 무게를 만들어 나를 땅에 발 딛게 해 줄 때까지 다만 조용하고 컴컴한 곳에 혼자 가만히 있고 싶다. 선반에 놓은 사물처럼 말이다. 조용하고 컴컴한 동굴, 내 안의 동굴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이제는 러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싶었다. 여전히 저곳에서 살고 있는지 러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번 편지에서는 하지 않았던 얘기를 해줘야지 생각했다.
러셀을 만난 건 2019년 겨울 아이슬란드 Sim레지던시 입주 때였다. 짧은 글로 안부를 전하고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엽서와 편지로 1년에 한두 번 연락을 해왔지만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Sim레지던시에는 2019년 11월과 12월을 지냈으니 러셀과는 두 달을 함께 했다. 아이슬란드 자체는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온전한 겨울 나라를 만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시에 나는 2년 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아 여러 한의원을 다니며 몸을 회복하고 있었고 체질식으로 음식을 조절하며 마늘, 파, 양파, 고춧가루, 후추, 참기름, 들기름 등 웬만한 향신료는 먹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되도록 기운을 아껴야 했고 일과에 우선순위를 정해서 움직이는 시기였다. 그래서 입주 때 마음먹기를 되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에너지가 소모될 모임이나 시간은 피하자 마음먹었다. 원래도 적극적으로 작가들과 교류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때는 더욱 혼자 시간에 집중했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동료 작가들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작업에만 집중하기로 계획했다.
11월 레이캬비크는 낮도 회색이었고 밤이 길었다. 아침에 깨어나도 아침 빛이 없으니 끝없이 이어지는 새벽만 있는 것 같았다.
아침이지만 새벽 같은 그 시간은 본래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안전함이 느껴졌다. 마치 내 안으로 찾아 들어가면 있는 내면 공간이 물질화된 것 같이 비 물질 공간에 있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내면 공간이 실재화된 그 느낌은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 같은 조용한 아침에 특히 더 누릴 수 있었다.
되도록 아무도 깨지 않은 조용한 아침에 부엌으로 가서, 되도록 아무도 깨지 않고 더 깊이 잠들기를 바라며 조용히 달걀 프라이와 커피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나마저 없는듯 조명 하나만 켜진 식탁에 앉았다.
스스로가 마치 새벽의 일부인 것처럼, 새벽 공기처럼 고요 속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은 고요함의 증인으로, 나의 친밀한 아침 동료였다.
이 완전하고 온전한 현존의 시공간에서 매일 아침, 나만의 아침 의식을 치렀다.
오늘도 내일도 이어지는 하루들은 대체로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 날들 중 불쑥 러셀이 나타났다. 부스스하게 날리는 파마머리에 잠이 덜 깬 얼굴로 방긋 웃으며 Hi 했다. (나 말고 또 다른 아침형 인간이 있다니 마음으로 실망했다.) 되도록 내 안의 고요가 흔들리지 않도록 찰랑거리는 물 양동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Good morning 인사만 하고 너를 지나갔다.
한번 두 번의 아침 인사 후 언젠가부터 인사가 길어지고 말이 이어졌다. 내 편견 속의 미국인: 말이 빠르다, 발음을 날린다. 다시 물어도 같은 속도, 같은 발음으로 말한다. 말이 비교적 많다 그래서 곧 피곤해진다.
그런데 러셀은 달랐다. 역시 편견은 편견일 뿐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실이 아니었다. 단어 뒷부분 발음을 자주 날리긴 했지만 말이 많지 않았고 빠르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소중한 시간을 더는 할애하지 않겠다 그때도 생각했던 것 같다. 첫 달 마지막 주에 첫 번째 단체 전시가 있었다. <Please Keep it with you>로 전시에 참여했고 다음날 러셀이 그림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다. 너무 맘에 든다고 하면서. 여러 칭찬을 했지만 빈말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것도 후하게 칭찬하고 감탄이 많은 서양인의 칭찬 = 빈말, 늘 그렇게 간주했던 것 같다. 그냥 하는 말, 지나가는 말, 립 서비스.
두 달 동안 자주 아침 테이블에서 만나 이야기를 했지만 떠나기 전까지 깊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당시엔 혼자 시간이 중요하고 소중해서 타인에 대한 공간이 내 안에 없었던 것 같다.
레지던시를 나온 후 나중에 내 그림을 사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그때의 감상이 빈말이 아닌 진심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말들이 모두 진짜였다니…
그 후 러셀과 나 사이에 엽서와 편지가 오갔다.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축하해 주는 내용이었지만 러셀의 응원은 상투적인 표현보다는 내 마음을 깨우는 문장이 하나씩 꼭 있었다. 그런 문장을 종이에 써서 책상에 붙여 두기도 하고 엽서를 책상에 붙여 두기도 했다.
6월은 여유롭게 쉬는 마음으로 보내고 싶다 했지만 할 일은 늘 생겨나고 혜경 씨와 나는 새로운 일들을 계획 중에 있다. 새로운 전시가 잡혔고 우리는 여전히 한 주에 두세 번의 미팅을 여전히 하고 있다.
아… 일주일만 낯선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다 올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러지 못해서일까 그때의 캄캄한 아침 동굴 시간이 떠올랐고 러셀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꺼내 문장들을 살폈다. 나는 이 친구를 잘 모르는데 이 친구는 어쩌면 이미 나를 잘 알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글을 다시 읽으며 들었다. 러셀에게서 주소 확인 연락이 오면 그때 내가 했던 생각과 느낌을 편지로 전하고 싶다. 그리고 상투적이지 않고 그녀의 삶에 어울리는 진심을 담은 응원의 문장도 써야겠다.
Rashelle Reyneveld
아이슬란드에서 현재 대학원에 진학 중이다. 태어난 곳과는 다르게 낯선 곳이지만 살아도 될 것 같은 곳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다. 나도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는 살아도 되겠다. 프랑스에서는 공부를 했지만 그런 마음이 든 적은 없었다. 러셀도 어쩌면 그런 기분이 들어 아이슬란드로 돌아와 대학원에 진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음악은 인스타를 @sumvivus에서 조금 엿볼 수 있다.
*진행 중 작업
여름을 주제로 떠오르는 생각을 작게 스케치하며 모으고 생각과 이미지를 모으고 있다. 몇 해전에 신체 장기와 자연물로 구성한 <심장 지성(知性)이라는 게 있다> 작업을 시리즈로 계획했는데 하지 못했다. 이번 여름에 여름 식물과 관련해서 한점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스케치 중이다.
혜경 씨가 효정 씨에게 질문합니다.
1> 지금 아이슬란드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본래의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이슬란드를 떠올리면 먼 곳? 멀리 있는 고요한 곳, 그런데 실제로 거기서 살게 되면 고요하게 느끼진 못하겠죠? 본래의 고향은 글쎄요. 나인채로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곳? 친절한 어둠이 있는 곳? 이 떠오르네요.
2> 함께 레지던시에 있을 때도 아침에 작업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효정 씨에게 아침은 어떤 의미인가요?
하루 중 아침이 컨디션이 제일 좋아요. 정신적인 면에서요. 깨어남의 시간이면서 영감적인 시간이죠. 아침은 같은 공간도 다른 시공간으로 만드는 것 같아 특별한 약속은 아침에 하려고 하기도 해요. 누군가를 새롭게 알게 싶거나 새로운 대화를 하고 싶을 때요.
3> 편견을 가지고 만났지만 진심을 알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걸린 것이 인상적이에요. 최근에도 이런 만남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네요. 혹은 이런 것도 궁금해져요. 최근에 가장 많이 소통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또 외면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도요.
최근에 편견이라기보다 첫인상과 겪어보니 다르네 했던 사람이 있어요. 첨엔 무뚝뚝하고 사무적이고 좀 불편하다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두 번 세 번 보다 보니 가지고 있는 세심함을 겉으로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알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모두에게 내가 가진 걸 다 보일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요금 많이 소통하는 사람은 단연 혜경 씨이고요. 일과 사적인 부분을 제일 많이 공유하는 것 같아요. 외면하고 싶은 사람은 최근에 조카 놈과 어색한 일이 생겨서 같이 살지만 현재 외면 중입니다. ㅎㅎ 저희 가족의 뉴 제너레이션인 조카들을 저희는 정말 사랑하는데요. 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저는 많은 걸 느끼고 배우게 되었는데 지금도 또 이 냉전을 통해 몰랐던 삶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나의 아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약자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성인이 된 조카들 얼굴에서 저는 자주 5~6살 아이 얼굴이 보이거든요. 아 갑자기 눈물이… ㅎ 엄마아빠언니오빠들 눈에 저도 그렇겠지 그러니까 늘 저보다 더 큰 마음을 쓰는 거겠지 하고 깨닫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