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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팜비치 Mar 24. 2019

어떤 어른이 되고싶은가

사회생활 첫 사수와 나


누구나 인생의 롤모델 엇비슷한 사람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안티-롤모델, "저렇게는 살지 말자"에 가까운 사람이 하나 있다.

그녀는 내 첫 사수였다. 소위 말하는 모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자신이 마음에 든 사람에게는 마음을 다 내어주는 정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대체로 모난 상사들에게 인기가 있는 편이라 (저주받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모난 구석을 웃어넘기는 나를, 그녀는 꽤나 신임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약간의 소유욕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예를 들어 팀장이 나에게 일을 시킬 때조차 이를 달가워하지 않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곤 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사수의 이런 태도는 당시 나의 평판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듯 하다. 그녀의 지난 연애사로 봤을때, 그녀에게 있어 애정이란 완전한 소유와 헌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추측하건데 내가 그녀와 비슷한 대학을 나오고 같은 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나를 자신과 일정 부분 동일시여겼던 것 같다. 사회에서 만나는 후배에게 진심으로 정을 내어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았기에 나는 그녀의 애정에 일정 부분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그녀는 견뎌내기 힘든 사람이었다. 사수는 소위 말하는 "네임드"- 이름만 대면 아는 또라이였다.

그녀는 그 나이면 대체로 체득하기 마련인 '자기 자신과의 거리감 조절'에 실패한 듯 보였다. 늘 자기 자신과 너무 가까웠고, 한 발자국 떨어져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게다가 한번 무언가에 꽂히면 미친듯이 사람을 들볶는 스타일이라, 그녀를 이해해보려 했던 좋은 분들도 신경질적인 장문의 카톡에 지쳐 떠나가곤 했다.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기에 알고 이해하는 세계는 너무 좁았고, 자신의 세계 밖은 무가치하거나 불온한 것으로 치부하곤 했다. 대화 속에서 "그래, 너는 그럴 수도 있겠다."가 안되는 사람이었다. 더 힘든 것은 스스로는 본인이 남의 말을 잘 듣고 자신의 눈치없는 농담이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왜 자기 생일 안챙겼냐고(그녀 생일날 나는 휴가중으로, 아프리카 케냐에 있었다) 회식자리에서 자신만의 조크(?)를하는 그녀를 상대하고 돌아오는 길이면 녹음기를 켜고 "난 절대 꼰대가 되지 않으리라" 맹세하기도 했다. 존경과 애정을 유지하기엔 확실히 좀 피곤한 상대였다.

사수를 너무 평가절하하고싶진 않다. 꼼꼼한 성격의 그녀에게서 나는 업무의 많은 중요한 부분을 배웠다. 인격 모독적인 처사를 하는 구시대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사실 사수에 대한 나의 감정은 애증을 넘어 일종의 연민에 가깝다. 그녀는 남에게 모진 말을 내뱉곤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뒤돌아서 혼자 더 신경쓰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모질지도 못하면서 왜 저렇게 매번 모나게 굴까. 왜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 저렇게도 모르고, 남들을 이해하려고도 못할까.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내게 준 답은 그녀는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할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자신의 경험에 반추해볼만한 폭넓은 인생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단 것이다. 자신의 말이 살아온 좁은 세계를 내비침을 모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당시의) 그녀는 미드 sex and the city 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와 동갑이었다. 나는 중학교때부터 그 나이를 '화려한 도시 여성의 정수'로 생각해왔기에 둘이 동갑이란 사실에 꽤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데, 다시 드라마를 정주행하며 그 나이가 되었을 때의 나의 모습을 캐리와 그녀 사이에서 저울질 해보곤 한다. 캐리처럼 화려하진 못하지라도, 경험에 닳아 둥근 사람이 되고싶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식견 넓은 어른이. 물론 주말마다 뵈브클리코 한잔씩은 들어주는 어른이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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