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광고팀 적응기
동물은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한다. 북극곰은 두꺼운 털로 추위에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부엉이는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의 크기를 키웠다. 지금 내 몸에선 새로운 촉수가 돋아나고 있다.
2019년 1월, 3년간 정든(?) 팀을 떠나왔다. 첫 사회생활, 첫 팀이었다. 나름 뜨거웠던 열정에 지금보다 순수하고 그만큼 미숙했던 내가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제련되던 곳. 처음 가져본 사원증의 달큰했던 소속감과 불현듯 찾아오는 현실의 떫은 거리감 모두를 알려준 곳이다. 돌이켜보니 즐거운 기억도, 힘든 기억도 많다. 좋은 선배들을 만나 나의 10년 후를 그들의 인생에 빗대어 상상도 해보고, 회식이 끝나고 집에 가서 술에 취해 난 절대 꼰대가 않으리라 맹세하며 울어본 적도 있다. 짐짓 있는 척 하기 좋은 사회인의 언어들도, 스트레스로 인한 위경련으로 퇴근길 택시에서 토하면 15만원을 내야한다는 것도, 모두 그 곳에서 배웠다. 사회초년생의 무모하게 뜨거웠던 열정과 곧 잘 식어버리는 미지근한 현실을 배운 팀. 그 곳에서 꼬박 3년의 세월을 보냈다
3이란 진정 묘한 마력을 가진 숫자인 것이다. 우리는 중학교 이후 3-4년의 주기로 환경에 큰 변화를 겪어왔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그리고 취업 후 3년. 학교가 뭔지 알겠다 싶을 때쯤 우리는 졸업을 하고,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 것 같은 오만에 빠진다. 해서 많은 연인들이 go냐 stop이냐를 결정하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3년이란 기간은 무엇인가를 이제 비로소 "알겠다"라는 생각을 들게한다. 새로움에 적응하기 바쁜 1년, 더듬더듬 기억 속 익숙함을 찾는 2년, 그리고 3년차, 다시 모든 것은 일상이 된다. 예상 가능한 범위 내의 변화에 능숙하게 대응하는 자신에 대한 묘한 자신감과 함께, 내게 너무 편하게 맞춰진 옷이 불현듯 작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3년차, 너무 익숙해져버린 근무환경에, 나 역시 go인지 stop인지 답을 내려야했다. 나는 권태로웠고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자진해서 새로 옮겨온 팀은 이전 팀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이전팀도 현재팀도 광고를 담당하고 있지만, 업무의 성격과 관점이 파격적으로 바뀌었다. 이 전팀에서는 퍼포먼스 마케팅을 담당했다. 퍼포먼스 마케팅이란 쉽게 말해 숫자로 실적 (사이트 유입이나 매출)이 증명되는 광고만 집행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광고를 많이 본다고 한들 매출로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새로운 팀은 브랜딩 관점의 광고를 집행한다. 당장 사지는 않더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브랜드 가치를 쌓고, 인지도를 확보하는, 숫자로 측정될 수 없는 정성적인 성격이 강하다. 둘 다 그릇을 만드는 일에 비유하자면, 이전 팀에서는 일회용기를 공장처럼 찍어내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것을 kpi로 삼았다면 이곳에는 장인처럼 흙을 빚고 몇번씩 뭉개가며 하나의 도자기를 완성하는 식이다.
도자기를 숭배하던 시절이 지났는데 다시 장인의 수련공이 되어 끊임없이 흙을 뭉개가며 야근을 하려니 영 몰입이 안된다. 일을 설명해주는데 어쩐지 흡수력이 신입때만 못한 것 같다. 한참 설명을 해주는데, 잠깐. 방금 뭐라고 했지. 잠깐 딴생각하다 놓쳤다 이런. 새삼 나이들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대단해보인다. 자괴감이 든다. 전팀에선 곧잘 일 잘하는 캐릭터로 통했는데, 이곳에선 제 앞가림 하나 못하는 신생아같다. 아, 내가 이렇게 무력한 존재였던가. 3년의 세월이 무색하다. 무엇보다 신입때처럼 일을 신성시하지않는 태도가 나의 흡수를 더디게 만든다. 신입때 내가 이 팀에 입사했다면 연예인을 만나고 TV와 극장에 내가 만드는 광고가 걸리는 이 일을 꽤나 숭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4년차. 마감시간이 일을 완성하는 성격의 업무를 더이상 신격화하지만은 않는다. 아, 이거 답이 없는 일에 내 영혼과 시간을 갈아넣어야 하는거구나! 어차피 고객들은 라면 한번 담아먹고 버릴 그릇을 이렇게 까지 흙 뭉개가며 만들어야하나 싶은 마음. 그러면서도 또 예쁘게 만들고는 싶어 꾸역꾸역 열심히 흙을 빚어본다.
하는 일이 그 사람의 성격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성과지향적인 전 팀에선 일의 맺음과 끊음이 명확했다. 때문에 받는 압박도 있었지만,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성격도 대체로 시원시원했고, 해서 때때로 선을 넘는 발언도 많았다. 다소 집단주의적 팀이어서 좋게 말해 으쌰으쌰, 나쁘게 말해 종종 전근대적일 때도 있었다. 새로운 팀은 숫자로 말할 수 없는 정성적 가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섬세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회식도 점심에 식사정도로 마무리하는 이 팀에선 맛집, 날씨, 유행하는 tv프로그램 같은 피상적인 대화가 오간다. 서로 선을 넘지 않기에 무례할 일도 기분이 상할일도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자극도 없다. 고기 먹다가 야채를 먹으면 이런 기분일까. 몸에 좋은건 알겠는데 왠지 입이 심심하다. 아, 나도 어느새 꼰대가 된 걸까. 트렌드에 맞지 않는 생각이지만 왠지 인간미가 덜한 것 같다.
이미 형성된 무리 사이에서 새로운 구성원이 되는 것은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갑자기 데이터베이스에 정보가 없는 사람들을 단체로 상대하려니 어디를 밟으면 터질지 모르는 지뢰찾기 게임처럼 온 몸에 긴장이 들어간다. 뒷목이 뻣뻣해진다. 내가 농담이랍시고 한 말이 이 곳의 문화에서도 농담일지 모르겠다. (처음 와서 연예인 생일선물 생각해보라기에 농담인줄 알고 넘겼는데 알고보니 중요한 업무였다.) 분위기를 읽기위해 한껏 더듬이를 곤두세우고, 없던 촉수도 만들어 붙여본다. 불편하지 않지만 마냥 쉽지는 않은 후배, 유쾌하지만 우습진 않은 동료가 되기 위해 발버둥. 어색한 미소만 지어본다.
낯선 길을 걸으면 어쩔 수 없이 이리저리 치이며 생채기가 나기 마련이다. 상처에 새살이 돋고, 그 흔적 위에 다시 생채기와 새살 돋기가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굳은살이 배기고 다시 어떤 자극도 튕겨낼 수 있는 두터운 살집이 자리잡는다. 자극에 무뎌진다는 것, 그것이 적응이라면 적응은 필연적으로 낯선 것에 무뎌지고 익숙해지는 죽음으로의 과정과 같을지 모른다. 생존을 위해 적응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죽음에 한발자국 더 가까워지는 일이라는 모순. 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를 떠나 낯선 것들을 마주치며 시야를 넓혀가는 여정 그 자체가 삶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모든게 낯설고 미숙한 지금의 이 팀에서 언젠가 다시 “알겠다”라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또다시 너무 작아져버린 이 세계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 때까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촉수를 곤두세워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