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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글쓸러 Oct 18. 2023

그래, 이렇게 된 거 어디까지 가나 끝까지 함 보자.


 친한 누나 한 명 있다. 학교 다닐 때 동아리 활동을 통해 친해졌고, 병원 실습 또한 같은 조로 배정되어 지냈으며, 지금까지도 연락을 자주하는 친누나 같은 사람이다. 소중하고 아끼는 누나이지만,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있었으니! 어떤 일이든 잘 풀리지 않는다고나 할까? 남에겐 금방 해결되는 일이 누나에게만 가면 유난히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누나가 레벨 1의 초보자 사냥터를 가면, 그 즉시 고레벨 하드모드 사냥터로 변모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아마 이런 비유를 누나가 듣게 된다면 등짝 스매시를 시전해주시겠지만, 뭐 어떤가? 사실인걸. 가끔 그런 생각도 얼핏 든다. 이 누나,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나?      


쓰나미 같은 고통의 누나?, 출처 Pixabay


 안 그래도 거대하고 웅장한 누나의 업보(?)를 더 강화시키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다. 상극 중의 상극이었다. 예를 들면, 누나가 환자를 대상으로 초진을 보는 날인데, 나와 같이 실습을 돌 때면, 이상하게도(?) 환자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성격으로 안 맞는 건 분명히 아닌데, 나와 마주하면 풀리지 않던 일들이 더 해결되지 않고, 심지어 비극(?)이 찾아오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조별 과제 때도 그렇다. 공정하고자 늘 제비뽑기 어플을 사용했는데, 결과는 늘 한결같았다. 나는 편한(?) 거, 누나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들. 제비뽑기 따윈 다시 하지 않을 거라고 선포하던 누나의 포효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누나의 비극을 강화시키는 존재는 바로 나였다, 출처 Pixabay


 누나와 실습에서 오랜만에 마주했던 때다. 무려 6개월 만에. 두 조가 합동으로 도는 병원 실습으로 말이다. 누나가 웃으면서 말하더라. “네가 없으니깐 모든 게 잘 풀렸어. 너만 있으면 문제야 문제.” 보통은 이 말을 듣고 섭섭하다는 감정이 들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 말에서 틀린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여섯 달 만에 만난 나와 함께 보냈던 한 달의 시간이 누나에겐 또다시 비극이었다. 본의 아니게. 제비뽑기도, 가위바위보도, 그 흔한 커피 한 잔 걸고 하는 내기에서조차 말이다. 모든 게 파국이었다.     


나와 누나가 만나기만 하면 멸망이었다. 사실상. 출처, Pixabay

    

 운명만큼은 상극이었지만, 그래도 가족처럼 지내는 이 누나는 결국 모교 외과로 입국하여 수련 받았다. 우리 모교의 외과엔 전공의가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빗대어 이런 별명을 붙였다. [00대 장겨울]...! 드라마에서도 전공의가 딱 한 명이 있던 외과의 모습. 그게 우리 모교의 외과와 사뭇 비슷한 탓이었다. 하여튼 [00대 장겨울]이란 이명 하에, 매일 1인분 그 이상의 역할을 어떻게든 해내며 분노와 화가 넘쳐흘렀던 누나. 매일 도망칠 거라면서 끝까지 버티던 누나는 본의 아니게 득도를 하였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 접하더라도, 자기는 성불이란다. 이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재미있는 사람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장겨울 같았던 우리 누나, 출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가 선택한 길을 걸었으며, 코로나 19라는 상황 덕분에 누나와 다시 만나게 된 건 약 4년 만이었다. 그것도 야구장에서. 그날은 2022년 7월 24일, 기아와의 경기 날이었다.     


사직야구장, 출처, visit busan


 그날의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회 초

안타, 안타, 글러브 맞고 굴절된 공 안타, 안타. 
스코어는 2:0     

3회 초 

안타에 도루로 2루, 담장 때리는 안타로 1점 득점, 안타로 1, 2루, 안타로 만루, 안타로 2점 추가. 
스코어는 5:0     

4회 초

볼넷. 선발투수 스파크맨 강판 후 진승현 등판. 도루 저지하려던 공을 놓치며 2루에서 3루까지 진출. 오른쪽 담장을 때리는 안타로 6:0. 안타로 1, 2루. 안타로 또 담장 때렸고 2루 도착 및 2점 득점. 스코어는 8대0. 볼넷. 안타였지만 잡을 수 있었던 걸 한 끗 차로 놓친 안치홍. 1점 추가로 주면서 3루 잔루. 진승형은 내려가고 김민기 등판. 볼넷 등으로 만루. 안타로 2점 득점. 
4회 초까지 스코어 11:0     

5회 초

연속 안타로 1, 2루. 담장 때리는 안타로 2점 추가되어 13:0. 2루 상태에서 홈런이 터져 15:0. 안타로 1루. 김민기 다음으로 문경찬 등판. 안타로 1, 2루. 안타로 주자 들어오며 16:0. 볼넷으로 만루. 또다시 안타로 2점 추가! 18:0. 
1, 2루 상황에서 홈런으로 21:0.     

8회 초 

최준용이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추가 홈런 맞았고, 2루타에 안타까지 내주며
스코어는 23:0.  


2022년 7월 24일의 내용을 좀 더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출처, KBO


그날은 많은 것이 인상 깊었던 날이다.      


1. 전생에 죄라도 지은 탓인지 수많은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았던 플루토늄 같았던 우리 누나가, 우라늄의 나와 만나 여전히 우리는 상극의 조합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야구장을 터트렸다.     

 핵폭파 / 출처, 허프포스트코리아

  

2. 5:0일 때 집에 갈지 고민하던 나에게 ‘어디까지 가나 보자!’라며 해탈의 경지에 이르셨다는 성불 선생님! 그런 그녀가 그물망으로 올라가야겠다고 분노를 터트린다. 해탈과 성불을 작살내버린 롯데다.     


3. 기아 안타에 열광하며 기아의 응원가마저 따라 부르는 롯데 팬들.     


4. 우리는 부산 갈매기를 불러야 하는데, 남행 열차를 같이 부르는 모습들.     


5. 기아를 응원하는 롯데 팬들을 말리는 조 단장님, 그러면 안 된다. 선수들을 응원하자! 그가 말하고 있는 사이, 저 멀리 공이 날아가고 있었다. 홈런이었다. 그 이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 보였다.     


그날따라 무거워보였던 그의 어깨, 출처 Pixabay


6. KBO 전설의 포수이자 현재는 기아에서 코치로 뛰고 있는 진갑용. 그의 아들이 바로 진승현이다. 기아는 화끈하게 이겼지만, 아들은 4피안타 5자책의 성적을 달성했다. 팀은 이기나 두들겨 맞는 아들의 모습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슬픈 상황.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게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나 같아도 그럴 거 같다.      


출처, OSEN

7. 그날은 외국인 타자 잭 렉스의 데뷔 날이었다. 데뷔 신고식이 너무나도 화끈했다. 렉스는 아마 그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8. 이 와중에 안타를 26개 내줬다.     


9. 우리는 안타 5개에 그쳤고.     


10. 점수는 1점조차도 내지 못했다.      


11. KBO 한 경기 최다 득점 차 기록을 세운 날이다.      


12.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 역사의 한가운데에 나는 있었고.     


13. 이렇게 직관 패배가 하나 더 늘어나 8전 1승 7패가 되었다.      




어느 사실에 가장 놀라야 할지 잘 모르겠다.

놀랄 게 너무나도 많은 고된 하루였다.   

   

여러분이라면 13가지 중에 어떤 게 가장 인상 깊어 보이는가?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다. 

     

2022년 직관 전적          

1회차 - 5/17 화요일, VS 기아, 4:3 패          

2회차 - 5/28 토요일, VS 키움, 6:3 패          

3회차 - 6/8 수요일, VS 삼성, 4:2 패          

4회차 - 6/11 토요일, VS KT, 4:0 패          

5회차 - 6/17 금요일, VS SSG, 6:2 패     

6회차 - 6/25 토요일, VS 키움, 13:5 패     

7회차 - 7/14일 목요일, VS 한화, 10:7 승     

8회차 - 7/24일 일요일, VS 기아, 23:0 패      

2023년 직관 전적          

1회차 - 4/1 토요일, VS 두산, 12:10 패          

2회차 - 5/26 금요일, VS 키움, 2:0 승          

3회차 - 5/27 토요일, VS 키움, 6:5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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