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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Sep 11. 2020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지난 토요일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와 놀이터에서 놀던 중이라 밤에 다시 통화하자고 하고는 정신없이 잊었다. 어느새 수요일. 회사의 모니터 하단 날짜를 보고 불현듯 생각이 나 그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니 바로 전화가 온다. 급한 일인가 싶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OO야 무슨 일 있어?”라고 물으니, 친구가 웃으며 답했다.
 
“그냥. 주말에 오랜만에 밖에 나갔는데, 날도 좋고 시원하잖아. 문득 네가 보고 싶더라”
 
그녀는 회사 입사 동기다. 10여 년 전, 신입사원 연수를 받으며 만나 이후 같은 조직에 배치되며 더욱 친해졌다. 같은 조직에 있던 우리 10명 동기들은 여행도 가고 모임도 자주 갖는 등 매우 가깝게 지냈는데, 그 친구와 유독 마음이 잘 맞았다. 나는 나와 이름도 똑같은 데다 한발 더 나아간 엉뚱함과 진취적인 모습 때문에 그 친구가 무척 좋았다. 꽉 막힌 회사와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그녀는 1년 만에 퇴사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떠나 그곳에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축시를 읽어준 게 벌써 7년 전.  지금은 6세, 4세 아들을 키우며 독립적인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사회에서 맺은 인연은 다 허상이라는 말은 잘 믿지 않는다. 언제나 보고 싶은 내 동무 S.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통화하다 보니 옆에서 그녀의 아들 2명이 엉엉 운다. “엄마 아아, 내 바지 왜 빨았어!!! 엉엉 내 바지!!!” 하며 대성통곡하더니 “티셔츠는 왜 안빨았어어어, 엄마!!! 엉어엉”하고 레퍼토리를 바꿔서 또 운다. 친구는 2주째 입은 애착 바지를 세탁기에 넣었다고 저렇게 우는 거라며 "어후" 한숨을 쉬었다. 문득 신생아 적 겨우 기어 다니기나 하던 애들을 1시간 넘게 차에 태우고 와 우리 집에서 여자 동기 모임 하던 날이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20대 중반 정말 철 모를 때 만났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흘러 함께 출산과 육아, 일 등 인생의 다양한 과제들을 해나가고 있는 게 참 묘하다.  오랜만의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엄마의 관심을 끌려는 형제의 통곡을 내버려 둘 수 없어 다음을 기약했다.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자. 전화 줘서 고마워 S야. 오랜만에, 참 좋다. 코로나 끝나면 꼭 만나”
 
그날 밤, 아이가 잠든 뒤 거실 소파에 앉아 예전에 적어 둔 노트를 펼쳐 읽었다. 바로 옆 열어둔 베란다 문틈 사이로 풀냄새 가득 머금은 여름 특유의 바람이 불어오자 나도 갑자기 그 친구가 생각났다. 김용택 시인의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를 읽으면 서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점차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익숙해진다. 어느 관계에서는 상대방이 내놓은 마음의 크기가 내 마음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서운하기도 하고, 어느 만남에서는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서운하게 했을 것이다. 바쁘다 보니 그간 세워둔 관계를 견고히 하는데 시간을 쏟기보다는 "필요가 있는" 사람을 찾게 된다. 당장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시간을 보낸다. 이런 만남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바삭거린다. 같은 회사라서, 같은 일을 해서, 아이 나이가 같아서 순식간에 넓은 공감대가 생성되지만 목적이 없어지면 금세 흐지부지해지는 관계들. 본심을 숨기는 관계들. 오로지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정보를 얻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 쓸모 있으면서 피상적인 관계들이 늘어나다 보니 왠지 인간관계를 잘 맺는 어른처럼 느껴진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던 중 좋아하는 분들과 오랜만에 식사를 함께 했다. 돌아와 즐거운 시간이었어요.라고 문자를 보내자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서로를 찾는다는 것, 만나면 행복하다는 것, 그래서 좋은 것 같아. 우리들의 관계.” 그 문자를 보자,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너라서" 보고 싶은 또 다른 사람들이 떠올랐다. 꽉 찬 보름달을 마주한 듯 마음이 왠지 따뜻해졌다.
 
나의 친구들과 지금 내가 호감을 갖는 사람들과, 내게 호감을 갖는 사람들과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알아두면 좋을 사람이라,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 정보가 많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햇살이 좋아서, 비가 와서 보고 싶었노라고 바람이 불어서 네 생각이 났다고 마음껏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런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오늘 달이 정말 예쁘다. 네 생각이 났어."라고 말해준다면,  그런 날은 정말 근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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