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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Oct 28. 2020

단발 머리로 자른 날 건네받은 다정한 인사

다정한 그대에게

머리를 싹둑 잘랐다. 여름부터 자르고 싶었지만 미뤘던 일이다. 팀 이동에 맞춰 나 머리 잘랐소! 인생을 새로 시작할 것이요! 외치는 꼴이 유치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아이와 둘이서만 1박 2일 여행을 떠난 지난 주말, 자유로운 기분에 가득 싸인 나는 권두운탄 손오공처럼 스윽 미용실에 들어갔다. 담당 디자이너가 웃으며 다가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10년째 단발을 고수하다가 어쩌다 머리를 기르게 되었고 기르다 보니 끝까지 한번 길러보고 자를까 싶어 긴 머리 여성이 된 그녀였다.


고객님! 자르시는 거예요? 단발로?

네 드디어.

얼마큼 자르실 거예요?

음, 코 끝 정도? 아니면 코와 입술의 사이 정도로요.

어머! 그렇게 짧게요?

아, 그 정도는 돼야 단발이죠. 원래 제 머리가 그 정도 길이었어요.

원하는 머리 있으세요?


휴대폰에 저장해둔, 마음에 드는 머리스타일 10개와 마음에 들지 않는 머리스타일 10개가 들어있는 폴더를 열어 한 장씩 넘기며 보여주었다. 저장된 이미지에는 단순히 사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에 두는 포인트들이 함께 적혀있다. 경험상 이 폴더를 보여주었을 때 머리를 망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사진 속 머리는 너무 초코송이라서 싫고 이건 너무 숱을 많이 친 것 같아요, 이 머리는 뒷머리가 좀 긴 것 같아서 별로고요, 웨이브는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되고… 왜요? 전 웨이브가 있으면 사람이 굉장히… 없어 보여요,  하하하 단호하시네요. 네. 다시 다음 장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커다란 c 컬이 좋겠어요. 이 머리는 웨이브가 있긴 하지만 앞머리 느낌이 마음에 들고요, 마지막 장 이 사진처럼 너무 초코송이 같지도 않고 너무 길지도 않은 머리가 좋아요. 고객님, 저 너무 떨리는데요. 이런 사람 처음 보죠? 네, 그렇지만 단발은 하나만 삐끗해도 느낌이 달라지니까. 역시 단발의 마음을 아시네요! 하하하 당연하죠. 파이팅!
 
날갯죽지까지 무겁게 덮고 있던 머리가 어깨 위에서 싹둑, 턱 선에서 다시 한번 싹둑, 두 번에 걸쳐 잘려나갔다. 5개월 전 했던 펌의 흔적이 남아있는 굴곡진 머리카락들이 발 밑으로 떨어졌다. 조금 더 다듬은 뒤, 디자이너가 물었다. 여기서 펌을 하조금 위로 올라가니까 길이는 입술선 정도까지 되겠어요, 어떻게 할까요? 더 잘라주세요, 한 1미리 정도만. 서걱서걱. 머리를 좌우로 흔들자 가벼운 머리카락들이 경쾌하게 뺨을 건드렸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매달려있던 추가 모두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가지치기한 기분도 든다. 고객님, 단발은 앞머리가 짧으면 이상하니까 지난번보다는 길게 갈게요. 역시! 말로 안 해도 아시네요! 앞머리까지 서걱서걱. 각종 제품을 바르고 롤을 말았다 풀고 샴푸실을 세 차례 들락거렸다. 두 권의 잡지를 띄엄띄엄 읽다 보니 어느새 머리가 완성되었다. 휴대폰 속 마지막 사진과 완전히 똑같은 머리가 거울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다. 마음에 드세요? 네 완전!
 
이틀 뒤 월요일, 회사에 출근했다. 나를 마주친 사람들의 반응이 무척 재밌다. 우선, 직접 마주친 사람들 중 원래 나를 오래도록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돌아왔네!” 친한 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했다. 머리를 기르던 내게 내 캐릭터가 없어지고 있다며 그냥 긴 머리 여성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던, 나 머리 자를까? 말까?라는 질문을 적어도 200번 정도는 듣고, 아 묻지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100번쯤 외쳤던 친구다. 역시 단발이네, 근데 꼭 캐릭터 같아. 마스크를 잘 씁시다 캠페인에 나오는 캐릭터. 알지 무슨 느낌인지? 마스크는 크고 머리는 짧으니 마스크만 보이는 그 느낌. 짧은 머리의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근래 보기 드문 짧은 머리를 보고 즉각적으로 반응을 쏟아냈다. “아니 왜 이렇게 짤뚱맞게!” 기분 전환 삼아요 라고 답했다. 정말 짧으니 당연한 반응인데다 세상엔 긴 머리를 더 여성스럽다고, 예쁘다고 여기는 사람이 더 많고 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아닌 것은 알고 있으니, 게다가 반응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짧은 머리니까 누가 뭐라 하든 전혀 개의치 않던 터였다. 훨씬 더 짧았던, 바리깡으로 마무리했던 시절에 소년 같다 군대 가냐는 말까지 들었으니 이쯤이야. 그런데 다정한 그들은 가만 생각해보니 본인들이 보인 원초적 반응이 괜히 미안했나 보다. 다음번 마주쳤을 때, 역시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든가 혹은 머리가 잘됐다 예쁘다 등의 칭찬을 한 마디씩 던졌다. 그러곤 호의를 최대한 드러내기 위함인 듯 무구하게 웃었다.
 
 더 재밌는 건 나를 멀리서 마주친, 가까운 이들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멀리서 마주쳤을 때 간단히 할 말이 있다면 입을 크게 만들어 그 뜻을 전하곤 했다. 평소였다면 아마 머리를 살짝 매만지면서 (머리 잘랐네!)라고 입을 크게 움직여 아는 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마스크로 입이 가려졌으니 입으로는 그 뜻을 전할 수 없게 되었다. 3일간 마주친 그들은 복도 끝에서 화장실 건너편에서 엘리베이터 끝과 끝에서 조용한 회의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눈을 제일 크게 뜬 뒤 양손을 턱 근처에 직각으로 꺾어 앞뒤로 세차게 흔들어댔다. 또는 손가락을 이용해 크게 가위질을 한다. 숭구리 당당 실사판이다. 너 머리 잘랐구나! 나 봤어!라고 외치는 듯한 현란한 손놀림을 연거푸 마주치다 보니 너무 웃겨서 마스크 밖으로 웃음이 새 나왔다. 나도 그 반응에 화답하며 마찬가지로 손을 턱 근방에서 크게 흔들고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점심 먹으러 가는 길, 사람들의 숭구리당당을 이야기하며 함께 웃었다.  말을 들은 이들은 즘 즐거운 기분을 전달하기 위해 눈웃음을 많이 치게 된다는 이야기부터 바디랭기지가 풍부해졌다는 말까지 쉼없이 재재거렸다.  말에 동의를 표하기 위해 다시 한번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또 웃었다. 나를 둘러싼 세계에 다정한 이가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달으면서.
 
 다정한 사람, 한자로는 말 그대로 정(情)이 많은(多) 사람이란 말이고 영어로는 warmhearted man 혹은 sweet라고 쓴다. 반면, 쿨하다는 말은 동서양 통틀어 멋지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수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갈고닦은 적절한 예의범절과 사회성을 갖췄지만 어딘지 모르게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마음이 쩍쩍 갈라지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이 있다. 이제 다정한 척하는 사람과 정말 마음이 정이 많은 사람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이는 멋진 (쿨한) 사람들이 아니라 다정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안다. 머리를 가지치기한 것처럼 차가운 관계는 도려내고 다정한 사람에게 관심을 더 기울여야겠다.  여전히 내 머리는 짤둥맞지만 애써 머릿속을 뒤져 예쁜 말을 골라 건네는 사람에게 나도 정이 가득한 말을 전해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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