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프릴 Nov 20. 2020

팅! 시냅스 끊어지는 소리

커피 한 잔 내려마실 여유가 없을 때

시작은 약 1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작은 사건이 있었다. 남들도 이 정도의 마음의 부침 정도는 경험하고 사는 건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인지 헷갈렸는데, 누군가는 내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일이라 했고 누군가는 너무 힘들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고통의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주 괴로운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나조차 내가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던 것이 더 컸다. 그러니까 무슨 느낌이었냐 하면 바람 한 점 없어 내 얼굴을 그대로 투영시킬 만큼 고요한 깊고 넓은 호수가 있는데 잊을 만하면 돌 같은 것이 계속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파동도 물결을 만들기 마련이라 호수에 비친 내 얼굴은 돌이 날아들 때마다 수시로 어그러진다. 물결이 이내 잦아들어 다시 내 얼굴을 찾게 되었으나 이따금 저기 저 날아오는 것이 돌멩이인지 돌덩이인지 저렇게 시시때때로 날아온다면 먼 훗날 호수 밑바닥엔 돌덩이가 가득 쌓여 이끼로 뒤덮이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선택의 문제도 아니라 어쩔 방도가 없었다. 미세한 파동은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조금씩 피곤해졌다.

 
  이렇게 미세한 파동을 감지하며 피곤을 느끼던 날이 계속되자 생각의 파고는 깊은 고민을 끌어올렸다. 아이의 초등 입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마침 초등학교 1학년을 앞둔 선배들의 영어학원 레벨테스트 소식 따위를 들어서 일 수도 있겠다. 모든  미취학 워킹맘의 근본적인 고민, 답이 없고 오로지 선택만 있는 그 고민 다시 시작되었다. 아이 8살에 나는 회사에 다닐 수는 있는 건가.  다닌다면 학원은 미리 준비해야할텐데 어떻게 어디로 가야하나! 역시 워킹맘은 사립을 보내야할까? 국제학교? 이사를 가야하나? 같은 고민을 나누던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러다 머리 터지는 거 아닌가요? 고민하다가 머리가 터져 죽는 사람은 없겠죠?” 이 말만 써놓고 보니 너무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생업과 육아를 저글링 하는 워킹맘에겐 언제나 나올법한 말이었다.  수는 이제 너울치는 바다가 되었다.

 찌되었든 고민을 시작했으니 작은 택을 하나씩 했다. 하지 해결해 나가는 희열 뒤에 불쑥 튀어오른 돌멩이  덕분에 수시로 어정쩡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겨울 방학에 아이와 놀거리뿐만 아니라 당장 주말에 갈 곳도 알아봤다. 생일이라 큰 맘먹고 고급스러운 털 옷을 사고 싶었는데 브랜드가 너무 많고 색깔은 미세하게 달랐으며 입는 것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편은 자신이 언제 등원을 책임져야 하는지 매주 물어봤고 나는 계속 똑같은 대답을, 수요일 목요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답하면, 아침에 뭐 먹여?라고 물었고 나는 냉동실에 가서 내가 준비해 둔 반찬을 보여다. 이 와중에 마켓 컬리에서는 5만 원에 9천 원 할인 쿠폰을 날려왔는데 마땅히 먹을 것이 없던 터라 쿠폰을 무시할 수 없다. 정부에서 갑자기  대출 제한 정책을 내놔 내년 1월에  필요했던 대출을 미리 받으러 부랴부랴 은행에 가는 길에  마켓컬리 어플을 열어 장을 봤다. 사에선 지난 3개월 간 진행한 프로젝트를 결산할 시점이 되어 다양한 자료가 메일함에 쌓였다. 어쩌자고 이 일을 맡았는지 나보다 경력이 많은 동료조차 이해 못하는 새로운 기술을 이해하는 동시에 리딩까지 해야하다니 스스로 대견한게 아니라 뭔가 대단히 잘못된 느낌 들었다. 누군가 거짓말을 했는데 지적해야할지 넘어가야할지 고민해야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말을 계속 뱉었다. 지난주 어느 시점부터 말을 굉장히 어눌하게 하는 지경이 되었다.
 
 어제 검토하던 자료에는  신호 입력 회로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있었다. 특정 입력 값이 회로를 타고 들어와 짜여진 루트를 따라 이동하다가 내부에 저장되기도 하고 외부로 출력되기도 한다. 한 회로에는 1초에 수백 개의 데이터가 동시에 입력되는데 너무 많은 데이터가 입력될 경우 일정 구간에서 과부하가 걸려 회로 자체가 망가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데이터 입력 주기를 조절한다든가 전압을 조절한다든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해결책을 회로에 구현한 자료였다. 이미 너무 복잡한 회로도에 추가된 개선안을 머릿속에 욱여넣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팅! 하는 느낌이 났다. 바사사삭 무언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정확한 느낌이다. 드디어 시냅스가 몽땅 끊어진 생생한 기분! 상에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소 원두 콩을 직접 갈아 커피를 내려마시는 것을 즐기는데 오늘은 도저히 모든 스텝을, 그러니까 콩을 분쇄기에 넣고  물을 끓인 뒤 동시에 드리퍼를 준비해 갈린 원두를 드리퍼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 과정을 해낼 자신이 없어 좀비처럼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사 왔다.  내가 커피 사 오는 것을 본 선배가 "왜 커피 안 내려먹고?"라고 물었다. 나는 "제가 상황이 이러저러해서 복잡한 단계는 거칠 수가 없고 그래서 그냥 단순히 나가서 사 왔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혀가 무거워서 긴 말이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어쩌죠 저 진짜 ?!"


오늘은 유난히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걷기도 힘드니 퇴근은 택시 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발 머리로 자른 날 건네받은 다정한 인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