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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Jan 19. 2021

주관적으로, 안녕하세요?

얼마 전 우연히 내 카드 내역을 본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부인 왜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 뭐라도 좀 사. 한 달간 카드 사용처 및 그 순서는 이렇고 거의 예외가 없었다고 한다.

병원- 약국- 편의점- 스타벅스- 네이버 쇼핑몰 (아이용품)
약국- 편의점- 스타벅스- 네이버 쇼핑몰(아이용품)......

그 무렵 나는 지금 삶이 참 안정적이고 괜찮다는 생각을 하단 참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말을 듣자 갑자기 머리가 띵 해졌다. 아 뭐지? 정말 왜 이러고 살지? 너무 불쌍한 거 아니야? 카드내역이 그 사람의 인생을 보여준다는데, 하는 거라곤 애기 용품 사는 거밖에 없고 지친 현실에 쉼이란 오로지 스타벅스의 맛없는 커피와 편의점 밖에 없는 인생. 급격하게 불행해졌다. 그날 오전 1년 간 기다린 토피넛 라테의 출시를 반기며 신나게 뛰어갔던 것도 편의점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웹툰이 그려진 세포깡을 품에 안고 룰루랄라 걸어와서 소파에 앉아 그 과자를 먹으며 책을 읽고 매우 행복해했던 것도 모두 머리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정말로 내가 왜 이러고 살지?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이 미친것이다. 명세서에 따르면 인생이 너무 불쌍하니까. 그래 지금 불행하니까 즉각적으로 행복해져야겠다! 돈을 모으기 위해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이던 중이었으나 쇼핑만큼 즉시 기운 나는 것이 없으므로 불행을 타파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써보았다. 남편이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할 정도로, 우리 부인은 참 중간이 없다는 말을 또다시 할 정도로 사보았다. 물론 물건들을 고르며 사는 동안은 기분이 좋았다. 코트가 예뻐서 출근길이 즐거웠다. 길을 가다 눈에 들어오는 예쁜 쓰레기를 고민 없이 사니 갑부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전달엔 명세서를 보며 어렴풋이 '불행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면 이번 달의 청구 금액을 보며 아주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불행해졌다. 돈을 이렇게 많이 쓰다니. 티끌모아 태산이란 말은 저축에선 항상 거짓이요, 소비에선 항상 참이었다. 다시 지갑을 닫아야겠다고 마음먹자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감이 몰려왔다. 2달 전 미래를 위해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였을 때와 달리 전혀 신나지 않았다.

며칠 뒤 나처럼 행복에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전무님이다. 어느 주말, 전무님이 필드로 골프를 나갔는데 주말임에도 회사 일이 계속 생각나 머리가 지끈거렸다고 했다. 그때 골프 멤버가 가까이 와서 묻더란다. (전무님은 이 질문을 한 지인이 얼마 전 퇴직하고 제2 라이프를 막 시작했는데 제법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고 덧붙였다.) "어이, O 전무! 지금 안 행복하지? 난 지금 엄청 행복해!" 그전까지 본인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스스로 판단한 적도 없고 그냥 인생을 그러려니 하고 살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가 띵했다고 한다. 놀란 맘에 우물댔더니 "난 진짜 행복한데! 풍경을 봐! 이렇게 멋있는 곳에 왔다니 정말 멋지지 않아?" 그때서야 가을의 정취를 뽐내는 절경이 눈에 들어왔는데 풍경을 자각하는 순간 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스스로가 너무 불쌍하고 불행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행복이 뭔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 번 불행감을 자각하자 더 불행해져서 "저 자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회사 일 고민을 하지 않아야 행복하려나?"까지 생각이 미쳤다고.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은퇴하신 분이 자격지심에 한 말은 아닐까 내심 짐작했지만 전무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내게 이 이야기를 한 시점은 골프장에 다녀온 뒤 2주나 지나있었는데, 그때까지도 본인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회사를 그만 두면 정말로 행복해질지 저울질하고 있었다. 나처럼 누군가 지적하지 않았으면 느낄 필요도 없었을 자기 연민과 불행감이었다.

이 두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터라 행복에 대한 책을 찾아 읽어봤다. 서은국 교수 "행복의 기원"과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다. 심리학에서는 행복을 강도가 아니라 빈도로 보고,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가치판단의 영역이라고 한다. 이를 주관적 안녕감 (subjective well-being)이라 칭했는데, 즉 내가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기는 일도 타인에겐 굉장히 행복한 상황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무척 부러워하는 타인의 상황을 정작 그 사람은 그렇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는 말이다. 대략 내 사례에 적용해보면 명세서만 객관적으로 안녕해 보이지 않더라도 스스로 상황에 만족스럽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말인 것 같다. 스스로 보기에도 안 안녕하다는 건 기준의 문제라는 것도 같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분야에서 둘째라면 서럽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쉽게 닭살 돋는 팔과 다리를 보면 행복의 허들이 굉장히 낮은 것 같은데 저렇게 명세서만 보고도 금방 불행해지는 걸 보면 내가 주관적으로 안녕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재밌는 일이 있다면 까먹지 않기 위해 글을 남기고 나쁜 일은 까먹으려고 어떻게든 노력하는 걸 보면 그리고 진짜로 다 까먹어버려서 같은 일을 또 당하는 바보 같은 일도 겪는 걸 보면 주관적으로 안녕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거는 같고. 우리 현시점 기준, 심리학자 말대로 주관적 안녕감이 행복의 기준이라면 나는 제법 행복하게 살 준비가 되어있는 거 아닐까. 만약 아니라면? 굳이 행복을 시시 때때로 평가하며 갈구할 필요는 없겠지만 고대 철학자부터 행복을 논하는 걸 보면, 헌법에까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걸 보면 행복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니 어느 정도는 주관적으로 안녕하도록 노력하며 살아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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