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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립 Jan 07. 2021

진짜 힌두 첸나이, 그리고 타라 북스

여름, 인도 첸나이

 첸나이에서의 3개월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차선도 없이 언제나 꽉 막힌 도로, 정리되지 않은 거리, 산타모니카만큼 아름다울 수 있었지만 쓰레기와 짓다만 건물들로 어지럽혀진 곧고 긴 해변. 있어야 할 것들은 으레 없고 없어야 할 것들은 차고 넘치는 도시. 장기 출장으로 머물렀던 첸나이의 심상이다.


첸나이, 힌두 사원들

  가장 최근에 떠나온 바다 건너 도시가 첸나이라니. 인도라니. '인도적인 것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마지막 기억이 첸나이라는 사실은 아쉽기만 하다. 내가 마음을 열지 못한 몇 안되는 도시들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첸나이에 머물렀던 3개월이 그저 싫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 전에 거쳐온 벵갈루루, 뭄바이에 비해 덜 도시화된 이 곳은, 인도 남부의 대표적인 도시인 탓에 인도 대륙의 원래 주인이었던 드라비다족의 고유 신앙인 힌두교의 흔적이 온전히 남아 있다. 도시 곳곳에 가득한 힌두교 사원들은 갑작스런 방문에도 넘쳐나는 사람들로 늘 떠들썩한 도시에서 찾기 어려운 조용한 평화를 제공한다. 싱가폴을 비롯한 몇몇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여행 책자를 보면 인도계 이민자들이 세운 힌두사원들이 관광스폿으로 등록된 경우가 있는데, 첸나이에서 그것들은 어디에나 널려 있는 삶의 일부다.

 

첸나이, 디왈리 축제의 밤

 하지만 첸나이의 진가는 밤에 드러난다. 첸나이의 밤거리에는 항상 신들이 빛난다. 새벽엔 힌두 축제의 노래가 흐르고 도시 곳곳엔 크고 작은 사원들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거의 모든 주말에는 도심 하늘에 폭죽이 터진다. 인도인들의 365일은 3억 3천의 신들과 항상 함께 하는 듯 하다.


 힌두교 신자인 한 인도인 친구가 내게 종교를 물었다. 없어, 그리고 있었던 적도 없어. 그렇게 솔직히 말했더니 어이없어 했다. 어떻게 종교가 없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통계에 따르면, 인도인의 80%는 힌두교 신자이며 15%는 무슬림, 2.5%는 크리스챤이다. 그 외에 시크교, 자이나교, 불교 등이 1%내외를 차지한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0.24%에 불과하다. 사실상 종교가 없는 인도인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전국민의 56%, 즉 절반 이상이 종교를 갖지 않는 우리나라와는 너무도 다르다.


 이 두 나라의 사람들에게 종교의 의미는 같을 수 없다. 한국인에게 종교는 ‘선택하는 것’이지만, 인도인에게 종교는 ‘주어지는 것’이다. 태어나서 성장하는 모든 과정에서 종교는 그들의 삶의 방식, 가치관과 연동되어 있다. 그러니 종교가 없다는 것이 의아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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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첸나이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일은 '수제 책'을 만난 일이다.

<타라의 손> 전시회 포스터

 2018년 여름, 판교 현대미술관에서는 <타라의 손>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타라북스'의 작업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타라북스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인도의 그림책 출판사로, 대표작인 <The Night of Trees>, <Waterlife>로 세계 최고 권위의 어린이도서상인 '볼로냐 라가치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기도 하였다. 


 타라북스는 '핸드메이드 책'을 만드는 출판사로 유명하다. 직접 만든 재활용 종이에 실크스크린을 활용한 수작업으로 그림을 인쇄한 후 끈을 이용해 제본을 한다. 실크스크린 인쇄는 앤디 워홀이 자신의 대표작들을 만들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첸나이에는 바로 이 타라북스의 사옥과 작업장이 있다. 첸나이 남동부 써유반미유르 지역에 있는 타라북스 사옥에 가면 타라북스의 설립 스토리와 주요 책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첸나이, 타라북스 사옥

 평소 인도 소수민족들과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Gita Wolf와 V. Geetha는 첸나이에서 우연히 만나 여성인권 단체를 운영하다 타라북스를 설립하게 되었다. 책을 통해 소수자의 권리 향상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타라북스는 인도 내 소수민족 여성들을 직접 작가로 고용하여 소수민족의 전통 설화, 여성 인권 문제 등을 주제로 그림책을 만들어왔다. 그런 노력을 인정받아, 대표작 중 하나인 <꿈꾸는 소녀, 테주>는 여성 권익 향상에 기여한 책에 수상하는 프랑스 '브린다시에르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책을 몇 권 사서 나오는 길에, 카운터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봤다. 책을 만드는 작업장을 견학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친 김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우버를 불러타고 10여분 떨어진 작업장으로 향했다.


 타라북스 사옥의 (인도답지 않은)깔끔한 모습을 보고 기대가 컸던 탓일까. 허름한 건물에 간판 하나 없는 작업장을 보고 처음엔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조심스레 들어가 말을 걸어 보니 이곳이 작업장이 맞단다. 인쇄실은 2층이었다. 가이드가 따로 있다거나 하는 호사스러움은 역시 사치였다. 마치 견학프로그램이 있는 것처럼 포스터까지 만들어놨지만, 프로그램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작업을 하던 인부들은 나의 갑작스런 방문에 하던 일을 멈추고 짧은 영어로 이런 저런 설명을 했다. 설명이래봤자 손으로 가리키고 몇몇 단어를 전달하는 정도였다. 시선이 옮아가면 인부들은 내게 보여주기 위해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첸나이, 타라북스 작업장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종이 위에 얇은 실크스크린을 덮고 첫번째 색을 입힌 후, 마르면 다시 스크린을 덮어 두번째 색을 입히는 방식이었다. 색마다 사람의 손을 거쳐가며 한장의 그림이 완성되면, 또다른 그림을 같은 방식으로 그려낸다. 그렇게 인쇄된 그림들은 끈으로 직접 묶는 수작업을 거쳐 하나의 책으로 완성된다. 이 모든 과정은 50여 명의 직원들이 첸나이 남부의 3층짜리 작업장에서 진행한다. 그리고 이 책들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세계 각 국으로 수출된다. 권당 가격은 평균 $40~$45 수준이다.


 0.2초면 전자책 한 권을 다운로드하는 시대에 핸드메이드북이라니. 권당 5만원짜리 그림책을 굳이 구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이 책이 가진 '물질성' 때문일 것이다. 직접 잉크를 뿌려 만든 타라북스의 책들은 한 장, 한 장, 그림의 입체적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다. 전자책이나 기계로 프린트한 책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촉감이다. 또한 핸드메이드라는 특성상 공급이 제한적이어서 희소가치가 높아지기도 한다. 수작업에 의한 미묘한 차이들은 각각 한 권의 책을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의 책'으로 만든다.

타라북스 <워터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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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첸나이는 오래 머무르기 어려운 도시다. 그것은 여느 인도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도시 전역에 펼쳐진 사원들과 끝없이 터지는 불꽃의 신기함, 그리고 타라북스는 까실거리는 도시의 표면을 조금은 부드럽게 해준다. 그래서 아마 그때의 3개월이 지금에 와서는 가끔 들여다보며 웃을 수 있는 추억으로 남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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