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인도 벵갈루루
여행으로 방문한 도시들, 글로벌 업무를 하며 출장 차 들렀던 도시들을 모두 합하면 아마도 거의 팔십여 곳은 될 듯 싶다. 그 중 최고의 도시를 꼽으라면 사흘 밤낮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답을 찾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최악을 꼽으라면 무릎을 쳤을 때 다리가 펴지듯 간단하다. 벵갈루루다.
이 도시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벵갈이라고 하니 막연히 인도 벵골 지역이 떠오르기도 했다. 벵골 지역은 동남아시아에 근접한 과거 동인도회사의 근거지이니 당연히 벵갈루루도 역삼각형 인도대륙의 우상단에 위치해 있을 줄만 알았다.
회사 프로그램의 하나로 장기 출장을 가게 되면서 부랴부랴 찾아본 벵갈루루는 인도대륙의 배꼽 정도에 위치해 있었다. 위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재는 인도라는 나라의 '뱃심'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중요한 도시다. 인구 수 기준으로는 인도의 경제수도 뭄바이와 정치수도 델리 다음에 해당하는 제 3의 도시이기도 하다.
출장 전 찾아본 벵갈루루에 대한 수식어는 이런 것들이었다. '인도의 실리콘밸리', '가든 시티', '인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등등. 영화 세 얼간이의 배경인 인도공과대학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며, 영국의 부커상 수상작인 소설 <화이트 타이거>에서 후반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곧 넷플릭스 영화로도 공개될 예정인 <화이트 타이거>는 아직까지 카스트제도의 잔재가 남은 현대 인도를 보여준다. 주인공 발람이 델리에서 겪는 하층 계급 운전사로서의 삶과, 어떤 사건 이후 사업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벵갈루루에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벵갈루루는 자본과 능력이 있으면 무엇이 가능한 곳, 그 지긋지긋한 카스트를 자본주의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이 도시는 인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도시이며 인도 스타트업의 본거지이니, 소설의 묘사는 사실에 기반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벵갈루루에 대한 이런 설명들이 '진짜 실리콘밸리'인 샌프란시스코나, 십여년 전 중국의 성장도시들을 연상시킨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해다. 성장하는 도시가 가질 만한 특성들, 예컨데 트렌드를 리딩하는 쇼핑 스트리트나 잔잔한 강물을 따라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모여 있는 팬시한 맛집거리같은 것들은 기대할 수 없다. 상당한 규모의 쇼핑몰들이 도시 곳곳에 분포하고 있지만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섬처럼 우뚝 솟은 몰들은 도시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돈과 사람이 모여들고 도시는 성장하는데, 그 응축된 에너지를 어찌할 바를 모른채 방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건조한 도시에서 숨쉴 만한 곳 중 하나가 쿠본파크다. 벵갈루루 정중앙에 위치한 쿠본파크는 거대한 규모로 형성되어 있다. 평일 낮에는 낮잠을 자는 사람들, 강아지들, 웨딩 촬영을 하는 예비 신혼부부들도 목격할 수 있다. 사실 벵갈루루는 도시화가 진행되기 전에 인도 귀족들의 휴양지였다고 한다. 다른 인도 중남부 도시들에 비해 습도가 낮고, 울창한 숲들이 많아 '가든 시티'라고 불렸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글로벌 IT기업들의 인도법인들이 터를 잡으면서 개발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예전의 '가든'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그나마 남아있는 도심의 공원이 이 곳, 쿠본파크다.
도시 대부분은 난개발로 어지러운 풍경이다. 길은 정비되지 않았고, 골목마다 쓰레기가 넘쳐난다. 짓다만 건물들과 찢어진 채 방치된 광고판, 무너뜨린 빌딩 잔해 위에 어슬렁거리는 돼지들. 어딜가나 북적이는 사람들만 없었다면 디스토피아 영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풍경이다.
나는 인도를 잘 모른다. 여섯달을 머물렀지만, 일을 위해서였다. 많은 도시를 가보지도 못했다. 인도는 넓은 나라고 하나로 정의하기에는 단일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엷다. 그렇기에 인도라는 곳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벵갈루루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매력이 없는 도시다. 매력이 없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낯선 환경은 내 자신을 알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벵갈루루에서의 경험은 정돈된 환경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런 소소한 깨달음을 위해 인도행 비행기를 타지는 말자. 세상은 넓고 좋은 것만 보기에도 인생을 짧으니, 조금은 신중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당분간은 힘들 테니까.